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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코스타 보이스-시카고 2010 기획기사] 땅끝 - 어떻게 ‘땅끝’으로 나아갈까

작년 KOSTA/USA 집회 후 layoff 통보를 받고 맘 고생하던 A 형제는, 고민 끝에 한국의 한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오랜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접한 한국의 현실은, 어떤 이의 말처럼 ‘신앙의 진검 승부처’였다. A 형제가 몸담게 된 회사가 대기업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업무 자체보다는 인간 관계에서 갈등에 처하기 일쑤였다. 경력사원으로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직장으로 옮긴 탓에, A형제는 주위 동료로부터 환영보다는 견제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다른 사람을 밟아야만 앞으로 갈 수 있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했다. A 형제가 신앙의 진검 승부를 해야하는 또 다른 곳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교육 현실이었다. 승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정글이 한국의 학교이다. 가정, 직장, 교회, 문화, 학교 등 모든 곳이 어그러저만 보이는 곳,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어떻게 이루어질까하는 의문이 드는 이 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곳이 ‘하늘’이며,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곳이‘땅’이다. 하지만, 이‘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버림받은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그러진 이 땅을 회복시키시겠다고 계속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그 약속의 신실하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가 이 곳에 들어오게 되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모든 곳이 하나님나라이며,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곳(그곳이 어디던 간에)이‘하나님의 나라’인 반면,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모든 곳(그 곳이 어디던 간에)이‘땅 끝’이다.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오게하신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종족을 우리가‘땅끝’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땅 끝’은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모든 곳이‘땅 끝’이라면, 그‘땅 끝’은 우리 주위에서 참으로 쉽게 만날 수 있다.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도구만으로 여기고 기능적으로만 취급하는 직업의 현장이 바로‘땅 끝’이다. 아이들에게 숨쉴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어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내돌게하는 한국의 교육 현실이‘땅 끝’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집중하기 보다는, 각종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게 하는 교회가 바로‘땅 끝’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도록 부름받은 교회 공동체는 분명 ‘땅 끝’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다시 말해, 아직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창조세계 곳곳에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복음을 선포하고,”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고후 10:5)”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땅 끝’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떤 이처럼 ‘평화를 이룬다’는 명목 하에 전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무참히 죽이는 일을 우리가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세상의 논리로 ‘땅 끝’을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땅 끝’으로 나아가야 할까? 

예수님과 바울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보자.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8~9a) 고린도 후서에는, 바울이 하나님께 몸에 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번씩이나 간청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응답하셨다는 유명한 고백이 나온다. 너무도 익숙한 내용이고, 또 자주 듣고 보는 구절이지만, 그 때마다 이 내용에 대해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든다. 고린도후서가 쓰여진 배경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바울이 과연 사도냐’는 것이었다.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자이여야 하는데, 바울은 뒤늦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기에, 그에게는 늘 그의 사도권의 진위에 대한 논쟁이 따라다녔다. 고린도후서에서는, 바울이 글은 잘 쓰지만 말이 어눌하고 큰 이적도 보이지 않는 것을 트집잡아 바울의 사도권을 공략하는 거짓 사도들이 등장하고, 바울은 이에 대해 절규하듯이 고린도교회에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정황 가운데서 나라면 어떤 논리를 전개할까? 아마도, 12장 초반에 나오는 바울이 세번째 하늘에 올라갔었다는 이야기를 좀 더 크게 이야기할 것 같고,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여러 병고침의 사건들을 증거로 제시할 것 같다. 그리고 ‘난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크게 부풀릴 유혹을 이겨내야만 할 것이다. 아니, 나는 적어도 ‘내가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만하면 됐다’고 하시더라’는 경험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냥 말하지 않고 넘어가겠지, 그걸 떠벌릴만큼 바보는 아니다. 그런데 바울은 정말 바보다.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에 가시가 있다고, 그래서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다고 대놓고 떠드는 이가 바로 바울이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내용을 내어놓으면서 바울이 스스로 바보가 된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며, 자신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된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문제삼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 ‘땅 끝’에 대해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다. 자신의 지위를 능력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약할 때 일하시는 하나님의 참 능력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애썼다. 바울은, ‘강해야 효율적이다’ 혹은 ‘로마를 정복해야 하나님나라가 온다’고 생각했던 세상에 대해 무기력하게 죽으심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신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한 자일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바보같은 삶’을 몸으로 살아낸 자가 바로 바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의 약함이 드러나는 대상이 다름아닌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그 유명한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예수님(비유에서의‘왕’)과의 관계성은 다름아닌 보잘 것없는 한 사람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고는 말이다. 이 세상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을 어리석다고 한다. 그나마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도, 그 사람 자체로 대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기능으로 대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기능을 잘 활용하는 사람을 유능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늘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가셨고 그들과 함께하셨다. 한 사람을 그 자체로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20세기 유대 랍비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예배다”. 우리는, 하나님이 왕으로 인정되지 않는 세상의 곳곳에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해야한다. 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서도 철저하게 예배자여야 한다. 세상의 논리인‘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는 없다.만일 힘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려 한다면, 비록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세운 ‘인간의 나라’이지 하나님나라가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철저히 십자가로 대표되는 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어 가신다.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그의 강함을 드러내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는 말이다. KOSTA/USA-2010을 통해, 우리의 약함을 자랑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고, 이를 통해 세상의 모든‘땅 끝’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