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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김영봉의 일상 속의 성소

[김영봉] "두렵도다 이곳이여!" -- 성전과 일상 (1)

이코스타 2004년 2월

시작하는 말

내가 제일 거북하게 느끼는 묵도송(頌)이 있다. "주는 성전에 거하시니 주 앞에서 잠잠해." 어느 교회에서든 흔히 들을 수 있는 묵도송이다. 한때 나는 이 묵도송을 좋아했다. 이 찬양을 들으면서 "주여, 제가 주 앞에 왔습니다. 저를 받아주소서"라고 기도하곤 했다. 예배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찬양이 또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언젠가 문득 '이게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말씀을 생각한다면, 믿는 자들이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인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더 충만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예배당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이고, 예배당을 나가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따지고 보면, 의식적으로 그렇게 믿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예배당에 앉아 기도 드릴 때마다 내 마음은 "일 주일 동안 세상에서 헤매다가 이제야 아버지 앞에 왔습니다"라는 식의 기도를 드리곤 했다. 무의식중에 하나님이 계신 예배당과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나누어 생각했던 것이다. 별 생각 없이 '그렇거니'하고 살다가 언젠가 문득 정신이 든 것이다.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 예배당 건물이 갇히실 리가 없지 않는가?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시 121:4), "너의 오른 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며"(시 121:5),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8)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 말씀이 옳다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우리 오른편에 계시어 지켜 주신다. 그렇다면 왜 나는 예배당 안에 들어가 기도할 때마다, 마치 어린 아이가 하루 종일 바깥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엄마 품에 안기는 것 같은 느낌을 가져왔는가? 물론, 그 느낌 자체는 나쁠 것이 없다. 예배당에 들어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안식을 느끼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예배당을 나와 집으로 향하면서 하나님 곁을 떠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 일 주일 동안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마치 주일에 하나님을 뵐 때까지 하나님 없이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내가 어릴 적부터 배우며 자라온 교회 전통에 의해 길러진 의식이다. 중학생 때 교회에서 잊혀지니 않는 일을 겪었다. 한 겨울 어느 날이었다. 추운 몸을 녹이려고 교회 벽에 있는 스팀('라디에이터'가 정식 이름일 것이다)에 걸터앉아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장로님 한 분이 다가와 호통을 치셨다. 얼마나 심하게 혼이 났던지, 지금도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분의 논지는 이러했다. "이 건물은 성전이야. 다른 건물과 달라.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집이란 말이야. 성전 안에 있는 물건은 모두 성물(聖物)이야. 거룩한 물건이란 말이야. 거룩한 물건을 함부로 하면 되겠어? 하나 하나 귀하게 다뤄야 해. 성물에 걸터앉는 법이 어디 있어?"

지금 생각해 보니, 그분의 논리대로 하면 '성전' 안에 있던 우리는 '성인'(聖人)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그 장로님도 성인인 우리를 그렇게 심하게 혼내면 안 되는 일이었다. 억지 논리를 펴자면, '속인'이 '성물'에 걸터앉으면 안되겠지만 '성인'이 '성물'에 걸터앉는 것이 뭐 잘못인가? 물론, 그것은 걸터앉으라고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니, 우리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하지만 사춘기의 어린 영혼은 분명히 스팀보다 아니 예배당 건물 전체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 그 장로님은 성물에만 생각이 갇히는 바람에 어린 영혼 하나가 얼마나 귀한지를 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와 비슷한 일들을 거듭 겪으면서 '예배당'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깊이 내 안에 각인되었고, 나는 여러 해 동안 그런 사고방식 속에서 세상과 성전을 오가며 살았다. 그 인식이 잘못된 것을 깨달은 것은 부끄럽게도 목사가 된 지 한 참 후의 일이었다. 늦게라도 눈을 뜬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다. 하지만 지금도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성전을 뚜렷이 갈라놓고 두 세계를 오가며 살아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오해를 제거하는 책임이 목회자들에게 있건만, 실상은 목회자들이 이 오해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학교 교수 시절, 나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목회자 세미나에 초청을 받을 때마다 이 문제를 역설했다.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시하고, 예배당을 성전으로 오해했을 경우 생기는 신앙적 문제들을 설명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목회자들에게 있으니, 교인들의 의식 변화를 위해 노력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 과정 중에, 나는 내 호소가 외면당하는 것을 자주 느끼곤 했다. 목회자들의 반응은 대개 이러했다. '그렇게 가르치면 집회에 나오는 열심이 떨어집니다.' '예배당을 짓자고 하면 헌신을 하지 않습니다. 성전을 짓자고 해야 헌금을 합니다.' '성전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정성을 다합니다. 예배당이라고 하면 마음이 소홀해집니다.'

이해할 만하다. 목회자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절박한 사정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자주 원론과 실천 사이의 거리감 때문에 고뇌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실천적 고려 때문에 성전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 교인들이 무조건 정성을 다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정성을 바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정성이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성전에 대한 잘못된 사고는 마침내 각 사람의 영성에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 시킨다. 그 치명적 해악을 제대로 인식해야만 '실천적인 유익'을 어느 정도 손해 보더라도 제대로 가르칠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문제의 심각성에 비례하여 성전에 대해 꽤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저, 예수님 이전까지 유대인들이 성전에 대해 어떻게 믿고 실천해 왔는지, 그 역사를 더듬어 볼 것이다. 배경에 따라, 이 역사 이야기를 지루하게 느낄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정도 참고 극복해 주기 바란다. 사안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1. 성전: 그 오해의 역사

"여기가 바로!": 야곱의 성전

성전에 대한 오해의 역사는 매우 뿌리깊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이 처음으로 지었고, 솔로몬의 성전은 모세의 성막에 뿌리를 두고 있고, 모세의 성막은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의 제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의 기록으로만 보면, 가인과 아벨이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린 것으로 나오지만(창 4:1-5), 제사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누리는 영예를 잃어버리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관습은 대대손손 이어졌다. 노아는 홍수 후에 단을 쌓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창 8:20), 이 전통은 족장들에게도 이어졌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단을 쌓는 데 정해진 곳은 없었다. 하나님의 현존과 은혜를 느낄 때마다 그들은 즉시 돌을 쌓아 제사를 드렸다.

야곱의 벧엘 이야기가 전형적인 예다.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유랑을 떠난 야곱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지친 몸임에도 불구하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 사막에서 돌을 베개로 삼아 잠을 청했던 야곱. 그의 돌베개는 그의 실존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암시한다. 그래서 장준하 선생이 자신의 처지를 돌베개에 비유하곤 했던 것 아닌가? 야곱은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 때문에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깜빡 잠에 빠지고, 그 짧은 순간에 꿈을 꾼다. 그 꿈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심을 깨닫는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나님의 문이로다"(창 28:16-17). 마지막 부분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으면 이렇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야곱은 집에 있을 때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들었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자주 제사도 드렸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이 혹시 계시다면 우주 저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일상 생활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바꿔야 한다고 믿고 온갖 술수를 동원하여 인생 역전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제 벧엘 광야에서 한 밤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난생 처음, 영적인 눈이 뜨였다. 눈을 뜨고 보니, 하나님이 거기 계셨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와 함께 있었고 모든 것을 보고 계셨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이 행했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는 말이 아닌가? 아무도 몰래, 혼자서 음흉한 흉계를 짜고 있을 때도 하나님은 그를 보고 계셨다는 말이 아닌가? 이 세상에 하나님을 피해 달아날 곳은 아무 곳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아 두렵도다, 이 곳이여!"라고 탄식했다. 아마도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아 통회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한 참 후, 마음을 수습한 야곱은 베고 자던 돌베개를 세워 제단을 만들어 부모들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제사를 올렸다.

애당초, 제사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곳에서 단을 쌓아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것! 제사 드리는 날도, 제사 드리는 곳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언제든, 어디서든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고 그분의 은혜에 감복할 때, 즉석에서 단을 쌓아 경배를 드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말하자면, 천하 어디나 성전이 될 수 있었다. 어디든 멈추어 경배 드리면 그곳이 성전이 되었다. 아니,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니, 어디나 성전인 셈이었다. 문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그들 중에 거할 성소": 모세의 성막

모세는 이집트로부터 백성들을 인도하여 40년 동안 광야 여행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陣) 가운데 계시면서 그들을 이끄신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신다(출 13:21-22). 그분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출 25:8)를 짓도록 명령하신 것은 한참 후 시내 산에서의 일이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내가 그들 가운데 머물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내가 머물 성소를 지으라고 하여라." 무슨 뜻인가? 성소를 짓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목적은 성소가 아니라 백성들이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당신의 임재 사실을 좀 더 명료하게 하시기 위해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시내산에서 내려 온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성막을 짓는다. 공사를 다 마치고 하나님께 봉헌했을 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고(출 40:34),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다"(40:38). 이로써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 되고, 삶의 방향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증거였다. 60만이라는 어마 어마한 무리가 광야 여행에서 하나의 무리로 결집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에 성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을 떠나가려 하지 않았다. 성막에서 멀어지는 것이 곧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 갔다. 사실은,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성막이 가는 곳으로 백성들이 따라 갔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도 온전한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백성들이 옮겨갔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이끄시는 방향으로 성막을 이동하게 했고, 성막이 가는 곳으로 백성들은 따라갔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어느 한 장소에 고정시키지 않았다. 반대로 '이동성 성막'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성막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저 안에 계시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면(없었을 리 없다!) 그는 큰 오해를 한 것이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성막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것이 성막을 짓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다윗의 갸륵한 열심

40년의 광야 방랑 이후 그리고 토착민과의 힘겨운 싸움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한다. 그 이후로 '이동성 성막'은 한 장소에 머물러 있게 된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성막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백성들의 제사를 돕는다. 백성들은 지파에 따라 땅을 분배받아 널리 흩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항상 성막을 보고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멀리 사는 사람들은 특별한 축제를 위해 성막이 있는 곳으로 여행을 해야 했다. 가까이 사는 사람들도 늘 성막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성막을 찾아가 제사를 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함께 하는 성막을 바라보며 "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했는데, 그것이 한 곳에 고정되면서 "아, 하나님께서 저기 계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막은 그들 자신을 제대로 보라는 상징이었다. 성막을 보고는 '여기 계시는 하나님'을 깨달으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성막을 보고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면 '여기'에도 계실 수 있는가? 원리상으로는 그렇지만,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생각은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는 뜻으로 아주 쉽게 곡해되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막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고 자나깨나 그곳을 사모하고 그리워했다. 그와 같은 심정이 시편에 자주 표현되어 있다. 가령, 시편 84편은 성소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보여준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1-2).

이동성 성막을 붙박이 성전으로 바꿀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엄청난 피를 대가로 치루고 영광의 제국을 이룩했을 때, 그는 갸륵한 생각을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호화로운 궁전과 이미 수 백 년 지난 낡은 성막을 생각하고는, 그것을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대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느 날 선지자 나단을 만나자 다윗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삼하 7:2).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호화롭게 살고 있는데 내 주 하나님은 저 허름한 장막 가운데 계시니 미안하기 짝이 없다. 주님께 좋은 집을 지어 드려야겠다'는 뜻이다. 참, 갸륵한 말이다.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이렇게 답하신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 7:6-7). 처음부터 하나님의 관심은 호화로운 성전을 짓는 데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할 정도로 지어지면 충분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값비싸게 지어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분명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느냐에 있다.

다윗이 성소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다면 이런 '갸륵한' 생각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성막을 하나님의 거처로 오해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집을 지어 드리고 싶어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던"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다면, 자신의 궁전을 그렇게 호화롭게 짓지 않았을 것이다. 궁전은 그곳이 왕의 처소임을 드러내는 상징적 건물이면 충분했다. '백향목'은 당시로는 레바논에서 수입해 온 가장 값비싼 건축 자재였다. 오늘 우리 식으로 하자면 이탈리아제 대리석같은 것이다. 당시로서 최고의 자재로 지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궁전을 그렇게 사치스럽고 호화롭게 지은 것은 하나님의 사람다운 일이 아니다. 욕심의 소산이다. 그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따르는 사람이었다면, 왕으로서의 집무를 보는 데 편리한 실용적이고 검소한 궁을 짓고 살았을 것이다. 욕심껏 호화로운 궁을 지어 놓고는 양심에 가책이 되자 하나님께 호화로운 성전을 지어 드리겠다는 생각을 지어냈다. (1)

하나님은 보기 좋게 그의 제안을 거절하신다. 그분이 원하는 것은 호화로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다. 사무엘하 7장의 후반부로 가면 더 흥미로운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11절). 말뜻은 이런 것이다.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짓겠다고? 정말 집이 필요한 사람은 너 다윗이고, 그 집을 지을 사람은 바로 나 여호와다.' 다윗에게는 이미 '백향목 궁'이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집이 필요한 사람은 너 다윗이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로 '집'은 '나라'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이 정말 관심을 가져야 했던 것은 호화로운 궁전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였다는 뜻이다. 영원한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 일로 불필요하게 국력을 낭비하지 말라. 너는 오직 영원한 나라를 이루는 데 관심을 가져라. 너로서는 그 일을 하지 못한다. 나의 뜻을 따르라. 내가 영원한 나라를 세울 것이다. 너는 나의 종으로서 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라.'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 솔로몬의 오해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답하시면서 "네 수한이 차셔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 7:12-14)라고 말씀하신다. 다윗을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이 예언이 자기를 두고 한 말씀인 줄로 착각한다. 때는 솔로몬이 태평 성대를 이루었을 시점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영원한 나라'가 자신에게 이루어진 줄로 알았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었다. 교만의 첫 번째 증상은 자기 착각이라 하지 않던가? 겸손은 자기를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솔로몬은 두로 왕 히람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리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당신은 명령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왕상 5:5-6).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백향목 성전을 지을 셈이었다. 아버지가 꿈꾸었던 것보다 더 화려하고 영광스럽게 지을 셈이었다. 그는 칠년 동안의 대 공사를 통해 성전을 완성한다. 하나님께서는 내내 침묵하시다가 마지막에 솔로몬에서 나타나셔서 율법을 잘 지키면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신다(왕상 6:11-13). 사후 추인 형식으로 그의 노력을 승인하신 것이다.

성전을 다 짓고 언약궤를 옮기면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왕상 8:12-13).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시면서 주신 애당초의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잊혀져 버리고, 성전은 '하나님의 처소'로 굳어져 버린다. 이후에 성전을 봉헌하면서 솔로몬이 드린 기도(왕상 8;27-53)에서도 '여기 계신 하나님' 혹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성소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30, 32, 36, 39, 43, 45, 49절) "그 이름을 성전에 두셨다"(29절)고 말할 뿐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지상에 오직 한 곳, 예루살렘 성전에만 그 이름을 두셨다는 뜻이다. 예루살렘 성전 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뵐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거기 계신 분'이지 더 이상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아니다!

솔로몬이 나단의 예언을 오해했다면, 그 예언이 말하는 '다윗의 자손'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다시 한 번 그 예언을 보자.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3). 앞에서 말했듯이, 히브리어에서 '집'은 '나라'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렇다면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한다'는 말씀은 실제로는 '내 이름을 위하여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는 뜻이다. 다윗의 자손 중 하나가 하나님을 위해 나라를 세울 것이고, 하나님은 그 나라를 영원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솔로몬의 나라는 영원하지 못했다. 다윗에게서 난 그 어떤 자손도 영원한 나라를 건설하지 못했다.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나라를 세우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영원하게 만들어 주셨다. 이렇게 보면, 이 예언은 누군가가 후에 성전을 지으리라는 예언이 아니다! 누군가가 후에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데, 하나님이 그 나라를 영원하게 만드실 것이라는 뜻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은 처음부터 없어도 되는 것이었다. 모세 때에 지은 성막 형태로 그대로 두어도 되었다. 아니, 그렇게 두는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언제든 움직일 수 있었던 성막을 건물로 대치하고 한 장소에 붙박이로 세워둔 것, 그것은 인간의 오해와 욕심의 산물이요, 그 이후로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빚어낸 문제의 원천이 되었다. 생각해 보라. 이 거대한 성전 종교 체제를 움직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원이 필요했겠는가? 솔로몬이 성전 봉헌을 하면서 소 22,000마리와 양 120,000마리를 잡았음을 기억해 보라(왕상 8:63). 건물 유지 비용,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인건비, 끊임없이 이어졌던 제사에 따른 비용 등 몇 가지만 따져도 막대한 돈이 필요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성전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성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다 보니 성전에 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는 일찍이, 도시 예루살렘이 번영하기에 여러 가지 제약 조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연안의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한 것은 이 거대한 성전 종교 때문이었음일 지적한 바 있다. 이 거대한 부를 지속적으로 창출하고 유지하기 위해 교권을 가진 자들은 온갖 부정을 동원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왕국 분열 이후

예루살렘에 붙박이 성전이 지어진 후,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의 죽음과 함께 남북으로 갈라진다. 그의 신하 중 하나였던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남왕국 유다의 왕이 된다. 솔로몬의 나라는 영원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왕상 11:9)고 설명한다. 솔로몬은 나단의 예언에서 말하는 그 '다윗 자손'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 때로부터 두 왕국의 끊임없는 갈등의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는 남북의 갈등을 이제 50년 동안 겪어 왔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200년 동안(두 왕국의 분열--주전 930년--으로부터 북왕국의 멸망--주전 721년--까지) 겪었다. 그 뿐이 아니다. 이 갈등과 반목의 감정은 남북 왕국이 모두 멸망한 이후에도 수 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

나라를 반으로 갈라 분리해 나간 여로보암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하나 발견한다. 자신의 백성들이 제사 드리기 위해 남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자주 왕래한다는 사실이다. 여로보암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남왕국]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가리로다"(왕상 12:27).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북왕국 백성들은 제사 드리기 위해 그곳으로 가야한다고 믿었다. 그러는 와중에 자기 백성들이 남왕국 유다에게 더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것을 여러보암은 우려했다. 그는 구테타로 정권을 탈취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 문제가 더욱 신경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자기 영토의 남쪽 끝에 있는 벧엘과 북쪽 끝에 있는 단에 제단을 세우고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을 설득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명령이 되었고 불복종하는 사람들은 처벌을 받는다.

이로써 북왕국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날 방법이 이제 완전히 막혀 버린 것이다. 벧엘이나 단에 있는 제단에 하나님이 계실 리 없었다. 게다가, 여호와를 섬기던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금송아지 앞에 제사를 드리겠는가? 그러니 이제 하나님을 뵐 희망을 모두 접고 포기할 밖에! 만일 야곱이 믿었던 하나님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만일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으면 그곳이 바로 성전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만일 성전은 하나님께서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임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들은 하나님 만나기를 포기하고 살다가 결국 가나안 토속 신앙에 빠지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 산당이 많이 지어졌던 것은 그들에게 우상 숭배의 속성이 특별히 강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곳에서는 언제나 우상 숭배가 무성히 자라나는 법이다.

남왕국 유다 백성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주전 721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에도, 남왕국 유다 백성들은 한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문제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이 남왕국 유다를 점령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시키고 많은 유다인들을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포로 생활을 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본토에 남겨진 사람들은 폐허가 된 성전터를 보면서 '하나님의 부재'를 목격했고,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멀어진만큼 하나님께로부터도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시편 137편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눈물 어린 심정을 잘 그리고 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절). 이렇듯 간절하게 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그리워했다. 그 이유는 하나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시,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었다.

539년, 새로 패권을 잡은 페르시아의 정책에 따라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한다. 그들이 귀환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들에게는 솔로몬이 지었던 옛 성전의 위용을 회복할만한 국력이 없었다. 힘닿는 대로 정성을 다했으나, 그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북쪽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하는 데 힘을 합침으로 신앙적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북쪽 사람들이 피가 이미 이방인들의 '더러운 피'와 섞였다는 이유로 도움을 거절했다. 북쪽 사람들은 적개심에 불타 예루살렘 성전 공사를 방해하는 동시에, 사마리아에 있던 그리심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지어놓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시온 성전을 중심으로, 북쪽 사람들(2)은 그리심 산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3)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성전과 제도와 신조를 만들어 놓고는 자신의 종교에 더 정통성이 있다고 다투었다. 북쪽 사람들은 지역적 위치 때문에 그리심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만 '혹시 하나님이 예루살렘 시온 성전에만 계시면 어떡하지?'라는 의구심에 자주 사로잡혔다. 남쪽 사람들은 시온 성전에 정통성이 있음을 믿었지만, 여전히 '혹시 하나님이 그리심 산에 계시다면?'이라는 의문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자신이 드리는 제사가 유효하려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드려야 하는데, 어디에 하나님이 계신지 확신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불안함! 그것이 당시 사람들의 신앙적 고민이었다. 반면, 교권을 쥔 사람들은 그들을 더욱 강하게 자기들의 성전에 예속시키기 위해 온갖 고안을 해 냈고 다양한 방식으로 압박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심하게 왜곡되고 진리는 외면 당했다. 이 같은 타락과 착취를 참다못해 성전 종교의 정통성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갱신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4) 그러면 그럴수록 보통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예수님이 나타나실 당시는 가히 영적 암흑기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상태였다.

오해의 역사의 의미

이것이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져 온 성전과 성전 신학의 간단한 역사다. 신학(神學)은 삶의 문제다.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전혀 달라진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의 변천 과정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오해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독자들이 지루함을 느낄 것을 각오하고 장황하게 역사적 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두렵도다 이곳이여!"라는 야곱의 깨달음처럼, 우리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께 경배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제단!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가시적 상징으로 시작된 성막! 그러나 그것이 한 장소에 고정된 건물로 변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 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된 성전! 이로 인해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혼란! 그들 중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하늘에 계시어 성전에 이름만 두신 하나님을 생각했던 백성들! 하나님 없는 세상에 살아야만 했던 그들의 방황과 갈증!

반면, 이러한 왜곡된 신앙을 더욱 강화시키며 종교적 착취를 자행하던 제사장들! 성전 제도를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던 그 많은 교리와 신조들! 나중에는 '보물 창고'로 여겨질 만큼 거대한 부를 축적한 성전! 그 부를 중심으로 기생했던 많은 종교 귀족들 그리고 그들의 타락과 위선!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진행되었던 은밀한 음모와 결탁! 그 결과로 일반 백성들이 당해야 했던 무거운 짐! 그 짐 아래에서 신음하며 시들어가던 그들의 영! 하나님께 이르는 안내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존재가 된 성전, 교리 그리고 교권! 그 모든 참상을 지켜보며 아파하시던 하나님!

이 총체적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살아 계신 여호와 신앙이 '성전 종교'로 고착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아, 이것이 과거의 이야기로 그쳤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행하게도, 이 타락의 역사는 그 이후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오늘 여기! 선교 2세기를 맞는 시점에서 총체적인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교회의 사고와 행태에서 이 오류를 목격한다. 그렇다면, 이 성전 종교에 대해 예수께서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가? 이것 역시 간단히 설명할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중요성에서 보거나 복잡성에서 볼 때, 독자들은 또 한 번의 지루한 독서를 각오해야만 이 문제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계속)


(1) 사업가인 어느 교인이 최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면서 자신의 목사에게도 똑 같은 차를 사 주었다는 이야기가 이 대목에서 갑자기 생각나는 것은 무슨 영문일까? 이 경우, 목사는 그 차를 받아도 될까 아니면 사양하는 것이 옳을까? 다윗의 제안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생각해 보면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2) 어느 때부터인가 북쪽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려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평양사람들'이라고부르는것과 같은 셈이다. 남쪽 사람들은 남왕국 형성의 중심 세력이었던 유다 지파의 이름을 따서 '유대인'이라고 불렸다.
(3)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발전된 여호와 신앙을 '유대교'라고 부르고, 그리심 성전을 중심으로 발전된 여호와 신앙을 '사마리아교'라고 부른다. 남쪽 사람들은 계속 혈통과 전통을 지킴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엄청난 세력의 유대 민족이 되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에 비해 혈통과 전통을 지키려는 열심이 부족했던지 지금 그 자취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해졌다. 아직도 그리심 산을 순례하는 사마리아교인들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4) 에쎈파라 불리는 광야 공동체가 대표적인 예였다. 이 파는 예루살렘 성전의 효력이 끝났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공동체의 창안을 부르짖었다. 에쎈파의 하나였던 쿰란 공동체의 문서(쿰란 문서 혹은 사해 문서)를 보면,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장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자신들의 공동체가 참된 성전이라는 주장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