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강(화요일):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요 16:33 b)
같이 기도 드립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님을 송축합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님을 기뻐하며,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더욱 합당하신지 계시의 말씀을 통해 배우게 하시되, 비록 인간의 메신저를 통해 말하는 것일 지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슴을 우리 모두가 체험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3일 동안 이번 코스타 수양회 중심 성구인, 요한 복음 16장 33절 말씀을 같이 강해하고 살피게 됐습니다. 이 말씀 짧은 말씀이지만 세 부분으로 나눠서 중간 부분을 오늘 살피고, 그 다음에 마지막 부분을 내일 살피고, 오히려 첫번째 부분을 글피에 살피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헬라어 본문으로는 우리 한국 번역과 순서가 같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논리 순서를 조금 바꿔 봤습니다. 우리 본문의 말씀 같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시작,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제가 어떤 신문 칼럼을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
여러분 이게 뭐 한겨레 신문의 칼럼인지, 또 조선일보 칼럼인지 머리를 굴리지 마시고 그대로 잘 받아 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인간 역사가 항상 그랬지만, 지금 이 시대는 너무 너무 각박하고 살기가 팍팍한 시대 입니다. 자본주의 한계가 막 드러났고, 그렇다고 공산주의 실험을 다시 해볼 수 없는, 아주 어려운 그런 상태 이죠. 여러분이 노인이 되는 40년쯤 후가 되면은 국민의 5명중의 한명이 노인이 됩니다. 그리고 국민 4사람이 한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되는 그런 어려운 처지에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출산율이 1.1 세계에서 가장 낮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 그리고 어쩌면 이 시대를 책임지고 살아가야 될 여러분들이 과연 이 시대를 어떻게 읽고 계시는지. 여러분이 지금 공부를 하고 계시지만 이제 졸업을 하면 금방 조국 현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또 세계 현실에 우리가 눈을 떠야 합니다. 늘어가는 지구촌의 인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며 우리 미래에 대한 통찰력은 어떠한지 인류가 역사 시작 이래 항상 추구해 왔던 샬롬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또 우리가 이 타락한 피조 세계 속에서 악에 지쳐 있는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세상을 이길 힘을 우리 스스로가 갖고 그런 용기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번 수양회 주제가 샬롬 입니다. 샬롬은 평화 혹은 평강으로 성경에 번역이 되어 있고, 신약 성경에 주로 나오는 평화의 원어는 에이르네라는 헬
창세기 1장 22절을 보면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많은 생물들과 공중의
그럴 때 우리를 복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즉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많은 뜻이 있지만
또 한가지는 우리가 그렇게 지음 받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 세분이
두번째로 우리 인간의 조건, 인간의 조건은 처음에 복과 그 다음에 의로움과, 세 번째는 하나님의 언약인데요. 의라는 말, 의는 한자말로 찾아 보면 '옳을 의'자, justice, 옳음, 옳고 그른 일이 있는데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선하고 틀리지 않은, 악하지 않은 어떤 것을 우리가 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죠. 로마서 3장 23절4절에 보면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슴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말해요.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을 때, 구원을 여러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중에 한가지 용어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이 의롭다 하심이라는 헬라말은 원래가 법정 용어에요. 그리스, 로마 시대에 사용하던 법정 용어로써, 어떤 사람을 취조해본 즉 죄가 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조치를 취한 다음에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무죄 선언 하는 것을 의롭다 함이라고 말해요. 그런 이제 전통 때문에 우리들이 로마서에 특히 나오는, 특히 로마서 5장 1절에도 보면 ‘그런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 우리가 원래 의롭지 않았어요.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불의, 죄를 많이 졌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를 대신 벌 받아 주심으로써 우리가 죄 없는 것으로 최종 판결을 하고 무죄 석방 됐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의롭다 하심은 사실은 그것을 포함하고 훨씬 더 깊은 뜻이에요. 그것에만 머무르면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나서 내가 또 죄를 지으면 나는 죄인이 다시 됐다가 의롭게 됐다가, 왔다 갔다가 하느냐 그것이 아니고, 이것도 이제는 포기라는 개념에서 했던 것처럼, 싹 여러분의 노트를 다 지운 다음에 새로 정리해 보세요. 의라는 말은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올바른 관계.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의롭다는 말은 내가 관계가 갖고 있는 관계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부를 충실하게 감당할 때 의롭다라고 말해요. 예를 들면, 아빠 엄마는 자식을 잘 돌보고 양육할 때, 의로워요. 그러면 자식은 어떠한게 의로운가 하면은 아빠 엄마를 잘 의지하고 아빠 엄마 말을 잘 듣고, 그 혜택을 받아서 무럭 무럭 잘 자랄 때, 의롭다 그래요. 그래서 이 성경에서 ‘의롭다’ 라를 말은 철저하게 관계적인 말이지 객관적인 어떤 기준 이것은 옳은 것이다. 이것을 지키면 의롭고 그것을 못 지켜 죄를 지으면 불의 하다. 그런 개념도 물론 있지만, 훨씬 더 깊어요. 관계적인 개념이에요. 관계적인 개념.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의롭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못할 짓을 해도, 하나님 한번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끊임 없이 우리를 우리에게 다가 오세요. 여러분이 인생에 많은 순간에 여러분의 인생을 계속 추적하시는 하나님을 계속 뿌리쳤지만 그러나 끝내 따라와서 여러분을 잡고 항복 시키시는 하나님의 그 의로우심 때문에 여러분이 구원 받으신 것이에요. 그 의롭다는 말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셨잖아요.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시고 사랑하여 주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로써의 모든 사랑과 복락을 배푸시는 관계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감당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의로워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의롭다 함을 받느냐
원래 관계가 있었어요. 그 관계를 아담 이후에 인간이 박차고 튀어 나와서 관계가 깨트려 졌는데, 그 관계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justify’, ‘의롭다 함을 받는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 말할 수 없는 신실하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 속으로 일단 들어갔어요. 들어가면, 설혹 여러분이 살아 생전에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그 관계가 다시 어그러져서 튀어나오는 법이 없어요. 왜?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너무나 큰 댓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시는 너무나 큰 댓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시금 돌아가 앉아 있는 하나님과 의의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관계를 조금 어려운 말로 성경에서 언약적
자, 그럼 이제 샬롬이 뭐냐 서론이 너무 길죠. 샬롬, 샬롬이라는 말은 우리 안녕하십니까, 굿모닝 하는 것과 같이 유태인들은 아침 저녁 만날 때 마다 샬롬 이렇게 말하죠. 아주 단순하고, 평화로은 좋은 관계 이런 느낌도 있지만 그 깊은 영적 의미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샬롬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은 그런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삶으로써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복과 영생을 받아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늘 의로운 관계 속에 있어야 하고 언약적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인간은 살아 있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놀라운 직분을 감당하기에 가능한 RESOURCE를 늘 받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아요. 창세기 2장 3장에 벌써 하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반드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 하셨어요. 그런데 샬롬이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그 복과 생명력을 공유하면서 그게 같이 뿌리를 내고 같이 발을 담그고 살고 있는 그 상태를 샬롬이라고 그래요. 이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우리는 하나님의 복과 영생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나만 받아서 누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받은 그것을 서로 나누면서 공유 하면서 같이, 같이 그 복을 누리고 사는 상태를 샬롬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 단어 중에서는 가장 잘 맞는 말이 CONVIVIALITY 는 말은 원래 대잔치 마을 전체 사람이 같이 참여하는 잔치를 말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아까 말씀드릴 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생명력을 받고 그분과 의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들은 소위 말해서 전인. 여러분 전인 교육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전인교육, 전인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INTEGRITY가 있는 매사에 봐서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학과 공부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음악도, 미술도 체육도 리더십도 가르쳐서 아주 근사한 사람을 만드는 것을 우리가 전인교육 이렇게 말하는데, 원래 그 전인이라는 말은 개별적으로는 완전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뜻은 타인과 더불어서 잘 살아가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을 전인이라고 그래요.. INTEGRITY가 있는 사람. 그 전인들끼리 모여서 사는 삶을 샬롬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영어 단어로는 또 한가지 TOTALITY 전체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해요. 제가 여러분의 핸드북에 작은 글을 실어놨어요. 리코스 카잔차스키가 쓴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좋은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을 써서 아주 불경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아주 진지한 구도자였어요. 이런 글을 좀 읽어 드릴께요. 이 사람이 밤에 꿈을 꿨어요. 크레타 사람인데 원래, 크레타 민요를 부르면서 산을 오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동굴에서 노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소매를 걷어 붙힌 그의 손은 진흙투성이였다.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을 대더니 그는 엄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노래는 그만해요 내가 일하는 게 보이지 않나요. 그러면서 그는 두 손을 내 보였다. 뭘 빚으시나요? 내가 물었다. 보면 몰라요, 동굴에서 나는 구원 받은 자들을 빚어 낸답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요? 누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외치는데 내 가슴속에 옛 상처들이 다시 터져 나왔다. 이 리코스 카잔차스키는 그리스 정교가 국교인 크레타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영적으로 방황을 했습니다. 진정한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 니체도 추종해보고 마르크스 공산주의도 추종해 보고 나중에는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말에 한이 맺힌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동굴의 노인이 내가 진흙으로 구원 받은 사람을 빚어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놀라는 거에요. 누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노인이 전체성을 파악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이렇게 말합니다. 전체성을 파악하고, 내가 나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반드시 모여 살수 밖에 없는 그 그룹에 한 사람임을 깨닫는 전체성, 이것을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의로운 관계, 그리고 동료 인간들 관계에도 의로운 관계,에 머물러 사는 것이 이 샬롬인데, 이 샬롬은 그야말로 너무 너무 좋은 상태, 너무 좋은 상태여서 제가 여러분에게 다 설명을 못하겠어요. Too good to explain.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근접한 단어로는 창세기에 나오는 좋았더라 라는 단어 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일장을 보면은 하나님이 빛을 창조 하시고 난 다음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이 바다와 뭍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그것을 보고 좋았더라,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는 심히 좋았더라. 이렇게 하시죠. 좋았더라는 히브리말로 ‘토우브’ 라는 단어가 그런 뜻이에요. ‘토우브’라는 단어, ‘좋았더라’가 이런 뜻입니다. 즐거운, 유쾌한, 좋은, 선한, 귀한, 탁월한, 적적한, 올바른, 탐스러운, 준수한, 충실한, 후한, 선대, 총명함, 보배로운, 길한, 아리따운, 번영, 복지, 은총, 은혜 이런 뜻을 갖고 있어요. 이것이 샬롬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퀄리티에요. 단순히 뭐 전쟁이 없고, 뭐 좀 사이 좋게 지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창조 하실 때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라는 위대한 역할을 감당하고 살도록 지어진 인간들이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더 할 나위 없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치밀함 같이 완전히 연합되어 사는 그런 퀄리티의 삶을 샬롬이라고 그렇게 하고 원래 우리 인간은 그렇게 지어졌어요. 우리가 너무나 망가졌기 때문에 도저히 옛날 일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됐지만, 그러나 우리들을 그렇게 창조 된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제 언어 정리가 끝났고.
너희가 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들어가겠어
아마 20세기에 가장 엽기적인 사건, 지금 동유럽에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일어났던 것일 거에요. 세르비아에는 정교도, 그리스 정교회가 자리 잡고 있고 크로아티아에는 침례교가 있었어요. 크로아티아의 침례교들을 다 죽이기 위해, 없애기 위해서 남자들은 다 죽이고 크로아티아의 침례교 여자들을 강제로 임신을 시켰어요. 그래서 한 종족을 말살하려고 시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 또 르완다의 후토와 투치족의 그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완전히 한 명도 없이 하겠다고 나선 것들이에요.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의 600만 명 유태인들 학살 이라던지 또 레닌과 스탈린의 공산주의 실험은 약 1억 명 정도를 죽였어요. 1억 명 정도가 죽거나 유형을 당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약 1500만 명 정도의 아메리칸 인디언을 죽였죠. 흑인의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요. 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와 독일 국경의 베르뎅과 솜이라는 두 곳에서 1주일 동안 전쟁이 벌어졌는데, 독일군 50만 명과 프랑스군 45만 명이 죽었어요. 하루에 어떨 때는 4-5만 명이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 따라서 그 기관총 한 자루에 어이 없이 목숨을 잃는 그런 일이 발생했어요. 상상할 수 없어요. 역사책에서 읽으면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는 그 백만 명 가량의 가족을 생각해 보세요. 수백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에 한과 눈물이 어려 있는 곳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라이프라는 이 사진 잡지에서 1차 대전의 이 장면들을 search 한 것을 봤어요. 거기 한 바윗돌에 기념관에 바윗돌에 전사한 청년의 어머니의 말이 불어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저는 불어를 모르니까 밑에 영어 번역을 보니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My son, 내 아들아, since your eyes were closed, mine, 내 눈은, 내 눈이 감겨진 후로부터 내 눈은 한시도 눈물을 그쳐 본적이 없다. 역사책에서 보면 솜과 베르뎅 전투에서 45만 50만 명이 죽었다. 이렇지만, 그 깊이 들어가 보면은 수백만 명의 눈과 한이 어려 있는 이것이 인류의 역사에요. 악. 샬롬이 깨어진, 샬롬이 상실되고 샬롬이 해체 되어 버린, 인류의 현상이 그런 것이고 현재 여러분과 제가 목도하고 있는 모든 개인적과 공동체적인 삶의 부정적이고 팍팍한 모습들은 바로 샬롬이 실종된 상태입니다. 나의 힘과 의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행과 비극이 굉장히 많죠. 태어날 때부터 몸과 마음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질병으로 지체를 잃거나 상해서 연약함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음주운전 때문에 다친 사람들, 너무나 가난하게 태어나서 한번도 유복하게 살아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임신되었으나 태어나 보기도 전에 성인들에 의해서 중지된 생명들, 또 공해 때문에 담배 한번 피워 보지 않고도 폐암을 걸린 사람들. 수백년전에 내가 가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갖다 버린 산업폐기물 때문에 오늘날 내가 그 오염된 음식을 먹고 암에 걸리는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의 불행들이에요. 츠나미, 2004년에 2007년에 중국 스촨성의 지진, 이런 것들을 보면 한꺼번에 수십만 명이 죽어버려. 1755년 11월 1일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일어난 지진, 그날은 주일이었어요. 그 지진 때문에 평화롭게 교회당에서 예배 드리던 그 도시 인구 30만 명중 삼분의 일이 즉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유럽에서부터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인간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이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저주 때문이다. 나의 혹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인류 역사 내내 있었던 인간의 죄의 결과이기도 하고 또 그것을 부추기는 사탄의 힘. 또 우리가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연계를 맡겨 주셨는데, 이 자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서 반항하기 때문에 생기는 모든 자연 재해,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악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그래요, 예수 믿어도 우리는 꼭 같이, 혹은 어떤 면에서는 예수 믿지 않는 자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믿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병에서 났기도 하고 어려움에서 헤어나기도 해요.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개인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세상의 고난에서 다 벗어 난다 그것은 거짓 가르침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여전히 환란을 당할 것이다. 물론 그 해법이 이제 내일과 글피에 나오게 되요. 왜 그래야 되는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연대성 때문입니다. 제가 2007년 코스타에서 조금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그냥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아담 한 사람 안에 들어 있게 창조 하셨어요. 사도행전 17장에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은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지으셨다’ 말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는 한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범죄한 걸로 카운트 됐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그거에요. 왜 아담의 죄가 나에게 영향이 있느냐, 그것을 하나님이 작정하신 인류의 연대성의 원리, solidarity principle 이라 부릅니다. 하나다,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가족에 태어난 가족이 있죠. 여러분이 선택합니까? 그 가족의 연대성 속으로 태어납니다. 태어나 보니까 그 아버지가 찢어지게 가난해요. ‘왜 이거 뭐야 이거, 나 딴 집에 태어날래.’ 꼼짝없이 그 가족에 찌들어야 됩니다. 이것이 연대성의 원리에요. 기가 막히죠.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런 법이 여기 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문화, 개인주의적인 문화에 자란 우리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에요. 너희들은 원래 한 가족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너무나 커지고 많아져서 도저히 우리가 가족으로 생각할 수 없는데, 아니 하나님은 너희가 한 가족으로 지어졌다 말합니다.
solidarity principle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다른 모든 인류와 관계가 있어요. 너무나 약 오르게도, 너무나 약 오르게도 기독교에서 이것을 잘 가르치지 못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이것을 먼저 선수를 쳤어요. 공산주의 선언, 세계 공산주의 선언의 중요한 내용중의 하나가 그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존재한 모든 사람들의 일은 나와 관계가 있다. 이것이 공산주의 선언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우리가 참 무신론 적이고, 유물론 적이기 때문에 절대고 그것은 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과 병행할 수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중요한 진리를 자기들이 선포를 해 버렸어요. solidarity 그래서 인간의 연대성을 가장 아프게 가르쳐 주는 것이 고난의 문제 입니다. 자 내가 병들었어요. 왜 병들었을까요?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인간의 고난을 죄의 문제라고 말할 때, 나의 개인적인 죄,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의 내가 고난을 겪는다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그럴 때가 있지만 그래도 굉장히 적은 것이에요. 굉장히 적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누가 고난을 겪을 때 가서 ‘회개 하세요’ 이렇게 말하면 안되요. 그거 염장 지르는 거지, 아니 내가 암이 걸리고 막 이렇게 있는데, ‘집사님 아마 회개 안 한 죄가 있을 것입니다. 뭐 은밀한 죄가 있을 것입니다. 회개 하세요’ 이러면 안 되요. 그런 경우는 있지만 아주 드물어요. 인간의 대부분의 고난은 내가 지은 죄 때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이에요. 어떻게 아담의 죄이기도 하고 우리 조상 중에 누가 저질렀을 수도 있어요. 그런 것들이 질병이나 사고나 공해나 자연재해나 그런데 왜 내가 그걸 당해야 해, 왜 왜 당해야 돼요? 어쩔 수 없는 거미줄처럼 복잡 미묘하게 얽히고 섥혀서 우리가 추적할 수도 없는 연대성 속에 얽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연대성 속에 태어났다는 것을 가장 끔직하게 아프게 가르쳐 주는 것이 인간의 고난의 문제에요. 그래서 여러분 그 고난이 아무리 작은 것이든, 아무리 큰 것이든 간에 낙심하기 이전에 배우셔야 됩니다. 아, 인간은 하나이구나. 인간은 원래 샬롬으로 존재하도록 지어진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는 것이 여러분의 고난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번 수양회를 거치고 집으로 돌아가셔서 남은 생애 동안 삶의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아, 이것은 다 다른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도 겪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내가 겪는 이 고난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동료 인간들을 위해서 내가 샬롬을 회복하기 위해서 처해야 되는 고난’이라고 조금씩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성공한 것입니다.
샬롬은 그런 것입니다. 내일, 모레, 샬롬의 회복에 대해서 말하겠지만, ‘너희가 세상에서 샬롬이 깨어진 결과, 고난을 당할 것이지만’ 이라고 말했고, 이 세상의 정체를 말씀 하셨어요.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말씀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샬롬을 복구하는 그 일에 들어가기 앞서서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고 고난을 겪을 때, 우리가 가장 힘든 것이 그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도무지 뭘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것이에요. 그런 질문을 강하게 가지셔야 됩니다. 그래야만 이번에 말씀들이 더 많이 들어올 것이에요. 그러나 고난은 우리는 고난이 있을 때 고난 자체도 괴롭지만 더 괴로운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에요. 그 다음에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 애기 낳는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세다고 그러죠 제가 안 낳아봐서 모르겠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애기 낳는 고통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 애기 낳는 산모들이 그토록 힘들어 하지만 애기 낳고 한 1년쯤 지나면 그러잖아요 ‘자기야 하나 더 낳을까?’ 이러잖아요. 그거 왜 그래요. 그 고통이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이에요.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고난을 받을 때는 하나님으로 버림 받은 거 같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에요. Why? Why me? 그래서 괴로운 거에요. 그런데 만일, 그 애기가 태어난다는 헤피엔딩처럼 우리도 고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고난을 물론 힘들고 괴롭지만 견뎌 나갈 수 있다면, 그런 것을 두고 우리가 고난에 존엄성 부여하기입니다. 고난에 존엄성 부여하기. 저는 되게 병약한 사람이에요. 60평생 살면서 한번도 건강해 본적이 없어요. 최근에는 지병이 망막에 도져서, 눈을 볼 수가 없어서 여기 참석할 수 있을까가 의문시 됐었어요. 저의 두 아이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심하진 않지만 장애가 있어서 학교를 제때 들어가지 못했어요. 우리 둘째 아이는 저희 도시에 지금 15년째 살면서 high school을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7번을 쫓겨났어요. 저의 엄마 아빠가 상당히 고학력자이기 때문에 저는 항상 이렇게 염려를 했습니다. ‘애가 태어나서 공부를 너무 잘하면 어떡할까’ 난 그런 거 못 봐주거든요. 그래서 ‘얘야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주려고 그랬어요. 근데 애를 낳아보니까 전혀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어요. 전혀 그런 말 할 필요 없이 충분히 못하기 때문에 고난이에요. 고난 아니, why me? 특히 한국 사회에서 한국은 다 학력을 중요시 하는 사회기 때문에 목사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는 건 굉장히 핸디캡이에요. 참 쪽 팔린 일이라고, 아주 어려운 일이에요. why me? 그러나 제가 그런 고난이 다른 인류가 겪는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겪는 샬롬이 깨어졌기 때문에 겪는 고난임을 알고 예수님이 친히 내려 오셔 그 고난을 자기 손으로 짊어지고 같이 당하심으로써 샬롬을 복구해 주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고난 받음이 불가피 하다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고난의 존엄성을 부여했어요. 지금은 힘들지만 마음에 평화가 깨어지거나, 기쁨을 잃어 버리거나, 그러지 않아요. 제가 눈을 못보고 있을 때, 어떤 분이 찾아 왔을 때, ‘왜 그리 편안하세요?’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내가 아마 우거지 상을 짓고 있어야 마땅한데, 평화로워요, 기쁨이 늘 있습니다. 샬롬이. 왜? 그 고난은 샬롬을 이룸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도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서 그 샬롬을 회복시키시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 하실 수 있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이 샬롬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비결이 뭔가를 기다리세요. 사모하세요. 여러분이 말씀은 기대해야 됩니다. 기대하고 마음을 활짝 열고, 마음의 그릇을 움푹 파게, 밥도 야트막한 접시에는 요거밖에 안되지만 움푹 파인 그릇에는 머슴 밥처럼 많은 양이 들어가듯이, 여러분의 마음의 그릇을 움푹 파게 만드시고 끝날까지 말씀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네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말씀 하셨습니다. 이 땅의 실체를 바라봤습니다. 왜 이 땅에는 고난과 슬픔과 눈물과 죽음이 가득한지를 왜 그렇게 되는지를 저희들이 살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외 없이 이 땅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슴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무의미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회복하실 샬롬을 이룸에 있어서 이미 샬롬을 맛보기 시작한 저희들이 마땅히 주님의 발자취를 쫓는 저희들 신자들로써 겪어야 하는 즐겁게 때로는 내가 자처 해서라도 짊어져야 하는 고통임을 깨달았고 존엄성을 부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 사랑하는 주님 이 자리에 머리 숙인 주님의 사랑하는 젊은 남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 비밀, 복음의 비밀, 믿음의 비밀을 깨닫게 도와 주시옵시고 십자가의 부활로 이루신 샬롬의 놀랍고 충격적인 그 임팩을, 그리고 또한 그 복을 이미 이땅위에서 당겨서 누리고 있는 누릴 수 있는 우리들의 그 복됨 놀랍기 그지 없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아 누릴 수 있는 귀한 기회로 삼아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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