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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세계관/신선묵의 Christian Leadership

[신선묵] “영적 지도자의 고독과 침묵”

최근에 한 교수님과 대화를 하던 중에 자신이 그 전에 수업을 듣는데 달라스 월라드 교수가 특강 강사로 오셨는데 얼마나 차분하고 조용하면서도 편하게 하시는지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나도 월라드 교수의 글을 직접 읽어보니까 아마도 하나님 안에서의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충분히 갖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영성 훈련으로써 고독침묵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하던 일을 멈추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 그리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걱정과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가 의지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홀로서서 침묵하면서 하나님께 촞점을 맞추는 것이다. 월라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독 하기란 장시간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취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손을 떼는 것이다. 고독 하기에서 걸음 나아가서 우리는 침묵하기를 배운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고요함에 들어가는 것이다. 고독과 침묵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님께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의 그분의 소유로 족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영혼이 있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며 세상이 아버지의 세상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세상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힘들지만 시간 속에서 고독하고 침묵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에서도 우리는 분주하게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인가 말을 주고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고독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께 촞점을 맟추기보다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침묵 속에 거하기 보다는 많은 말로 시간을 채우려는 때가 있다. 하나님 안에서 고독의 시간을 갖기보다 무슨 행동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고 우리를 내려놓음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여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도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하시는 일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의 임재 속에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것이 고독이요 침묵이다.

 

달라스 윌라드 교수는 사람들이 홀로 있기와 침묵 하기를 어렵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인상깊게 읽었다. 그가 파스칼의 팡세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자기 방에 조용히 머물 없다는 가지 사실에서 비롯된다. 연약하고 유약한 인간 조건으로 타고난 빈곤으로 너무 비참해서 깊이 생각하면 아무것도 위로가 안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대신에 자신의 관심을 분산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끄럽고 바쁜 것을 지독히 좋아한다. 그래서 고독의 즐거움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다른 은밀한 본능, 원래 좋았던 본성의 잔재가 있어서 실제로 행복이란 바쁜데 있지 않고 오직 안식에 있음을 알고 있다. 본능이 앞에서 말한 분산 욕구와 충돌하고, 그로 인한 생각의 혼란 때문에 사람들은 흥분 속에서 안식을 얻으려 한다. 그리고 닥쳐오는 난관을 모두 이겨냄으로써 안식의 문이 열려야만 지금 내게 없는 만족을 얻을 것이로 생각한다. 말들을 쉽게 표현하면 사람들은 안식을 구하면서도 안식을 주는 고독하고 침묵하기를 두려워하고 바쁘게 시간을 보낸다. 안식을 구하고 있기에 바쁜 일들을 빨리 극복하고 다음에 안식을 갖겟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있으면 다른 바쁜 일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고독의 시간을 갖고 침묵하고 있는 사람은 어찌 보면 공동체와 사람들과의관계를 피하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회피하는 사람같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이다. 우리는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안에서 참된 평안을 소유하게 된다. 이렇게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진정한 관계와 의사소통을 만든다. 아이러니컬하지만 고독할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누릴수있고 침묵할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

 

첫째, 우리는 고독을 선택함을 통하여 사람들과 진정으로 함께 있기를 배운다. 우리는 고독을 통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고독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이 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가 모든 껍데기를 벋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진실되게 만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고독하여 자신을 직면할 때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게 되고 만나게 된다. 고독할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관계를 맺을 수가 있다.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을 갖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소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관계 속에서 진정으로 만날 있다. 자신 안에 안식과 평안이 있기에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있는 힘과 용기가 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대하고 만날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고독 속에서 대면하지 못한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감당할 힘이 없기에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만 머문다. 홀로 있을 없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없다.

 

둘째, 우리는 침묵을 선택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한다. 우리는 침묵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 속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듣는다. 우리가 하는 중에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말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침묵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말을 발견한다. 우리는 자신의 말이 정리되었을 때에 비로서 하나님께 대화로 나아갈수가잇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가 있다. 침묵을 통하여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정확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나와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침묵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있고 말의 표현 배후에 있는 마음을 이해할 있다. 스스로 침묵할 없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유와 마음이 없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자신의 말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마음 속에 품어진 뜻까지 아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대화란 말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마음의 소리를 주고 받을 있어야 한다.

 

고독과 침묵 믿음의 선배들이 많이 실천하였던 영적 훈련인데 우리 교회안에서 많이 잊혀진 훈련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하면서도 실천하기 힘든 영적 훈련이 아닌가 생각한다.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사람들과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