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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 사역/캠퍼스 사역 Q&A

[이일형] 청년시절에 갖기 쉬운 우상들은 무엇입니까?

캠퍼스 사역 Q&A

청년시절에 갖기 쉬운 우상들은 무엇입니까?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하여 죄를 짖는 인간과 그 죄를 사하고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노력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 안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될 때 비로소 평화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평화란 타락 이전의 창조질서와 일치되는 상태로서, 이에는 stability와 harmony의 두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즉 모든 피조물과 자신의 관계가 원래의 창조질서대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조화와 일치가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된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아무 양심의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온전한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타락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신이며 그 결과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게 되어 창조질서와의 일치가 파괴된 상태입니다. 인간의 우상숭배는 바로 절단된 하나님과 그로 말미암아 파괴된 자연과의 관계를 인위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이 먼저 있어서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먼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상의 그늘을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타락한 모습의 도피처로 또 창조질서와의 관계파기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우상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의 성향(orientation)과 또는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에 대한 문제를 4가지로 요약한 부문이 에스겔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언약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안에서 행하는 일들은 마치 기독 청년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면서 세상 속에 빠져 사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고전6:19). 그리고 교회는 거룩한 작은 성전들이 모인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서에 나오는 환상은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될수 있는 말씀입니다.

1. 달콤한 세상의 보상들

첫 번째 죄는 성전 북쪽 문 앞에 서 있는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시키는 이 우상은 마치 하나님의 성전에 대항하여 직접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듯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에 떳떳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세상을 하나님과 동등한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특히 성전 앞에 서 있는 우상을 우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주로 무의식 가운데서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스스로 의식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모두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고 공부와 직장생활을 하나님께 대한 예배라고 말은 하지만 그들의 실질적 동기(motivation)는 세상이 줄 수 있는 보상에 대한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렇기에 공부에 실패를 하거나 직장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비관하며 좌절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공하면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이 교만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깊숙이 그리고 떳떳이 자리잡고 있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질투하신다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2. 불완전 하지만 눈에 보이는 해결책

두 번째 죄는 성전의 뜰 안에 있는 비밀공간에서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려놓고 향연이 구름같이 오르고 있는 향로를 각기 손에 든 칠십인 장로들의 행위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위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이 의식주 문제에 대한 불안과 자신들의 형편 (바벨론의 포로)에 대한 절망에서부터 유발되는 행위에 대한 묘사입니다. 손에 든 향로의 구름 같은 향연은 그들의 깊은 종교적 성향을 표현해 줍니다. 삶에 다가오는 무서운 풍파를 대하며, 또 미래 진로의 문제와 현재 대하고 있는 힘든 공부를 직면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보다는 종교적 행위로서 도움을 받으려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이는 마치 불공을 드리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참된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신"을 찾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마치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면 해결될 것으로 여기는 도피행위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종교적 성향도 행위도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에 근거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사랑)에 대한 절대적, 자신의 목숨을 건, 신뢰입니다.

3. 실제크기 보다 크게 보이는 세상의 아픔들

세 번째 죄는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의 입구에 앉아 있는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곡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울고 있음은 그들의 슬픔의 원인과 또한 그들의 슬픔을 달래줄 수 있는 근원이 하나님과 동떨어져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위의 말씀은 가족을 형성하고 번식하는 가운데 생기는 여러 가지 여인들의 슬픔에 관한 문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담무스의 부재로 인한 슬픔은 (i) 사랑의 실패(실연 당함)에서 오는 여인들(혹은 형제들)의 아픔, (ii) 결혼한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는 괴로움, (iii) 가정 파괴로 말미암은 상처, 그리고 (iv) 세상이 주는 향락에 대한 그리움 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첫 번째 세 가지 슬픔이란 곧 '인생의 고뇌'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 슬픔의 해결책로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또한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절망적 상태에서 그 아픔이 너무 커서 고침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과연 이 깊은 곳까지 미칠 수 있을까 의심하는 행위입니다. 네 번째의 경우는 삐뚤어진 마음의 성향 때문에 세상적 향락에 관한 그리움입니다. 이 또한 고침을 받아야 하는 죄 입니다.

4. 잘못된 곳에 투자하는 각자의 소망

네 번째 죄는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떠오르는 태양)에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그들이 강포로 그 땅에 채우며 하나님의 노를 격동하고 있습니다.

위의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이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빛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행위입니다. 태양은 열과 빛을 지구에 제공함으로 생태계 유지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태양은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떠오르는 태양은 새로 시작되는 권력의 중심부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이런 행위는 (i) 세상에서 권력 있는 사람들과 밀착하거나 혹은 장래가 유망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ii) 교회의 (눈에 보이는) 양적 부흥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참된 목적과 그 수단이 뒤바뀐 상태를 묘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문을 쓰는 학생들에게 하나님보다는 지도교수가 더 중요하고 크게 보이는 일, 직장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상사가 하나님보다 더 능력있어 보이는 일들이 다 그 예들입니다. 젊어서부터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인맥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는 행위도 포함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타인을 해하는 것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자신의 중요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독 청년의 우상으로 가장 깊이 자리잡고 있는 문제는 여호와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모든 삶의 구석구석에서 인정하고 신뢰하지 않는 것이 우상을 섬기는 일 입니다.

Let us acknowledge the LORD;
let us press on to acknowledge him.
As surely as the sun rises, he will appear;
he will come to us like the winter rains, like the spring rains that water the earth. (Hos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