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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치유와 회복의 신학

[정진호] 지성, 그 깨지기 쉬운 유리알 유희

회복과 치유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지성, 그 깨지기 쉬운 유리알 유희

(1)

문명 충돌과 붕괴의 時論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세계 무역 센터(WTC)의 붕괴 장면은 전 세계인을 경악하게 한 세기적 사건이었다. 정보화시대를 실감하며 생방송으로 엽기(?)적 상황을 지켜보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바야흐로 다각화된 문화에 의한 문명 충돌의 시대로서 21세기를 예견했던 새뮤얼 헌팅턴과, 인류 역사 속에 나타난 문명의 한계 수익 체감에 의한 문명 붕괴의 필연성을 역설한 조지프 테인터의 노작(勞作)이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2,000년 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건너갈 때 타고 간 배를 가리켜 유럽의 운명을 싣고 간 배였다고 말했듯이, 세계 역사는 끊임없는 서진(西進)을 계속하며 새로운 문명과 역사의 주역들을 탄생시켜왔다. 21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발생한 WTC의 붕괴는 어쩌면 지난 20세기 세계 정치 경제 문화의 주역이었던 한 문명이 무너져 내리고 이제 또 다시 새로운 주역의 부상을 예고하는 역사의 한 서막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지난 20세기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앞세운 과학기술을 무기로 유토피아 사회 건설을 추구하며 시작되었다. 20세기가 평등과 자유의 이데올로기를 나누어 가진 체 동서 냉전의 양극화 구도로 치닫는 동안, 세계는 수많은 전쟁과 혁명 속에서 무고한 피 흘림과 비인간화의 값을 치렀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는 다원화된 문화 전쟁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피 흘림을 예고하고 있음이 아닌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철학과 과학의 가장 오랜 주제였다. 지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의 라메트리가「기계인간」의 개념을 제시함으로 출발한 소위 <생물학 결정론>은 모든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된 고도로 복잡한 기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낳았다. 급기야 그것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유전자를 지닌 사람만을 남겨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열등한 인종을 도말(?)하는 히틀러 식의 급진 우익 사상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생물학 결정론에 반대하는 <문화 결정론>자들은 인간은 주변 환경과 교육 문화에 의해 언제든지 가변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존재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문화 결정론이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칠 때, 소위 행동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을 환경적 자극에 의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환경적 기계장치 또는 시스템으로 파악하게 된다.

결국 이 논쟁은, 인간이 안고 있는 피면 할 수 없는 두 가지 조건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에 대한 시각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다. 분명 인간은 자연적 요소를 지닌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문화적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을 파악하는 시각이 <자연>이냐 <문화>냐 하는 양자택일의 이원론에 빠질 때 결국 인간의 사물화(死物化)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만다. 이데올로기화한 원리주의(原理主義)는 항상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그래서 항상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생각을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인간은 <자연>과 <문화>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중간 영역은 철학과 과학의 오랜 탐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블랙박스(Black box)로 남아 있다.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것이야말로 경직된 사고의 위험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균형 감각이며, 내 자신에 대한 무지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출발선이 될 것이다. 문명 충돌의 시대에 자신이 붕괴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사의 완충지대를 바로 읽는 지혜와 탄력성이다.

위 글은 2001년 10월 18일자 연변과학기술대학 신문의 <북산가 칼럼>에 실었던 글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대학 신문에 게재한 글이라 신앙적인 내용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 해답을 논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블랙박스>로 처리 해버린 부분에 대한 신앙적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적 힘은 무궁무진해 보인다. 지난 20세기에 인류는 천체의 궤도를 예측하여 달과 화성에 로켓을 쏘아 올리고, 원자의 구조를 파헤쳐 신기한 반도체와 컴퓨터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그 이성의 힘으로 미사일의 탄도를 예측하고 원자 폭탄을 만들어 대량 살상을 일으킨다.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 지닌 양면성이다. 어째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2)

세계 제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그의 생애 최고의 대작이자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작품 <유리알 유희>를 발표하여, 1946년 전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그것은 나치스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 독일 지성인의 자존심과 전쟁의 광란과 공포에 젖은 20세기 지성의 회복을 희구하는 헤세 문학 집념의 산물이기도 했다. 서기 2,400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래소설이자 유토피아 소설인 <유리알 유희>는 인류가 20세기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지성의 회복을 통한 종교적 이상향을 건설하고 영재 교육을 통해 학문과 예술의 정신문명을 극대화하는 지적 유희를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학문과 예술의 최고의 경지를 헤세는 <유리알 유희>에서 마치 수학적 대위법으로 작곡된 바하의 파이프오르간 푸가(Fugue)를 연주하는 것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더 이상 정교하고 더 이상 웅장하며 더 이상 합리적이며 더 이상 경건할 수 없는 꽉 짜여진 위대한 음악... 그 음악의 명인들에 의해 펼쳐지는 유토피아라는 대곡은 마침내 연주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인간의 역사는 헤세가 지향하고 갈구했던 대로 이상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고대로부터 인간의 이성적 힘을 믿었던 소수의 사상가들은 탁월한 지도력을 지닌 소수 엘리트 혹은 철인(哲人)을 통해 다스려지는 이상국가(理想國家)를 만들고 싶어했으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이 그랬고 공자가 그랬다. 그 시대와 환경, 그리고 방법론은 서로 달랐지만 퇴계와 율곡이 그러했고 크롬웰이 그러했으며 마르크스가 그러했다.

지금부터 꼭 100여 년 전.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인류 역사의 수레가 역동적으로 올라서던 시기에 서구 세계는 17세기 이후 자신들이 이룩해 낸 과학기술의 혁명적 진보와 그에 따른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학 혁명에 의해 형성된 기계론적 세계관이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는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게 되었고, 마침내 서구 지성인들의 자만심으로 표출되었다. 19세기 중엽 찰스 다윈에 의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던 진화론은 그와 같은 시대사조를 등에 업고 채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전 유럽과 미국을 뒤덮는 사회학적인 혁명적 풍조가 되었고 진화 사상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서구 열강이 전 세계를 제국주의 식민지 영역으로 패권 쟁탈을 하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전 세계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첨예하게 나뉘는 과정 속에서도 양 진영 모두 과학 기술의 무한한 발전과 더불어 마침내 인류는 20세기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되리라는 신념만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주의는 현대성의 상징이었고 20세기를 여는 화두였다.

그와 같은 신념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그 꿈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그리고 마침내 인류가 이룩해 낸 과학기술의 열매가 핵 폭탄이라는 엄청난 살상 무기로 등장하면서 온 인류를 핵전쟁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한국 전쟁과 월남전의 참상, 끝없이 이어지는 냉전 상황 속에서 서구의 지성은 자신들이 가졌던 진보 이데올로기가 어쩌면 신기루에 불과할 지 모른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소위 탈 현대, 즉 포스트모던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적 논쟁이 일반 대중들의 삶 속에까지 파급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었다. 여전히 교육 현장에서는 진보 이념이 신앙 고백처럼 설파되고 있었고, 대다수의 대중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것이다. 탈 현대의 외침은 20세기 지성이 이룩해 내었던 거대하고 냉혹한 기계문명에 대한 반발과 자성 그리고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와 불안감의 표출이었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911테러로 21세기는 그 서막을 연다. 곧 이어 반격으로 가해진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은 세계인들로 하여금 지난 20세기 세계의 학문과 예술을 이끌어 가며 정치와 경제의 종주국이요 지성 국가로 자처했던 미국에 대한 극심한 반발과 실망,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성과 이념으로 시작했던 20세기보다도 감성과 경제 논리만을 앞세우는 21세기는 역사를 더욱 극심한 지적 공황과 불안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높다. 과연 인류는 이제 지성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3)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으로 창조된 인간... 그 특별한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성경은 세 가지 구성 요소를 암시하고 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한 창조행위를 표현하는 바라(bara)라는 동사가 단계적으로 세 구절에 등장한다. 첫째가 절대 무의 상태에서 시공간과 물질을 창조하는 1절이요, 둘째가 의식적 존재로서의 생물을 창조하는 21절이며, 마지막 세 번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는 27절이다. 인간은 이 세 가지 단계를 통해 물질적 요소(body)와 의식적 요소(soul) 및 영적 요소(spirit)를 함께 갖춘 존재가 되었다. 물론 유기체로서의 인간에게 이 세 가지 요소가 삼분법(三分法)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는 않다. 육체적 결함과 상처가 더러는 의식과 영적인 함몰을 가져오기도 하며, 영적인 치유가 육체의 손상을 회복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기에 인간은 이 세 가지 요소를 지닌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한계성을 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세 가지 요소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D. G. Barnhouse는 인간을 하나님에 의해 아름답고 완전하게 지어졌던 3층집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 1층인 몸(body)은 흙으로 지어진(formed) 물질적 요소요, 제 2층인 혼(soul)이 인격성(personality)을 나타내는 요소라면, 제 3층인 영(spirit)은 하나님과의 대화와 교제를 가능케 하는 영성(spirituality)적 요소이다. 문제는 그렇게 아름다웠던 인간이 불순종의 죄를 지어 타락(fall)하는 그 순간 마치 원자폭탄이 터진 것과 같은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여 인간의 본질적 요소를 근원적으로 훼손해 버린 것이다. 폭탄이 투하된 순간 하나님과의 대화를 가능케 하던 제 3층은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파편만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음), 인간의 지성, 감성, 의지를 나타내던 제 2층은 파괴되어 절반이 남았으나 남은 절반도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제 1층 육체는 그 순간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폭발진동에 의해 보이지 않는 미세 균열(micro-crack)이 가득 발생하여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약속했던 대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인간의 지성을 과대 평가했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성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신론과 유물론으로 무장된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과학을 올려놓음으로써 새로운 부르주아 지배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이 인간을 결정론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해 가는 과정에서 서구 사회에 처음 등장한 것이 <기계적 결정론>이다. 즉 인간을 단지 유전자와 생체 화학반응에 의해 결정되는 물질적 산물로 보는 견해이다. 이는 나중에 유전자 구조의 이해와 분자 생물학의 시작과 더불어 <생물학 결정론>으로 발전하며 다윈이즘에 의한 적자생존의 원리와 결합하여 자본주의 보수,우익 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놓게 된다. IQ, 가부장적, 성적(性的), 사회적, 인종적 나아가서는 정치,경제적 불평등의 기원을, 인간 내부에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유전적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심리학 결정론> 또는 <문화 결정론>은 인간은 오직 그가 자라온 환경과 교육에 의해 결정되는 역사적 산물로서 파악한다. 의식의 정신적 진화과정을 변증법적으로 기술한 헤겔에서 출발하여 인간 행동을 외부 자극에 의한 학습된 반응으로 파악한 스키너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인간의 정신 현상을 철저히 탈 신격화(脫神格化)한다. 이는 교육과 학습을 통한 사회변혁을 꿈꾸는 좌익 급진 사상에 영향을 주며 역시 다윈이즘의 자연도태의 원리와 결합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 계급투쟁의 사회주의 철학으로 발전해간다.

인간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생물학 결정론이든 문화 결정론이든,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바라본 인간에게는 도덕적 책임이 사라지고 만다. 그가 어떤 사회적 문제나 불평등이나 혹은 폭력을 야기하거나 당하더라도, 그것은 생물학적 원인 혹은 그가 처했던 환경적 원인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상 위에 유토피아를 꿈꾸고 출발했던 결정론적 세계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심각한 사회적 질병과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끔찍한 전쟁으로 지난 20세기를 점철시켰다. 보수 우익 사상이 빚어낸 우생학은 생명경시 현상으로 나타나 나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일본의 남경대학살과 713부대의 만행을 일으켰으며, 좌익 급진 사상이 일으킨 공산 혁명은 사회주의 국가마다 엄청난 피의 숙청을 불러왔다. 결정론주의자들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지를 몰랐다. 그들의 이성은 너무나 불완전해서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불완전한 이성으로 완전한 이상사회를 결코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서 냉전으로 팽팽히 맞서던 20세기가 그 균형을 상실하고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내닫던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영국 사회를 중심으로 신 우익(New Right)이라고 부르는 정치권력이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레이건 과 대처를 거쳐 부시와 블레어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권들의 배후에는 생물학 결정론의 사상으로 새롭게 무장하여 세계의 정치,경제 질서를 보수 우익의 패권 하에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깔려있다. 그들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결합하여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한 신탁 국가로서 타민족을 징벌하는 정의의 칼을 휘두르며 새로운 십자군 운동과 우생학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2000년 6월 26일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영국의 블레어 총리는 인간의 DNA 염기 서열의 위치를 판독하려는 인간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의 초안을 발표했다. 그것은 생물학 결정론의 위대한 승전보였으며 신 우익 세력의 21세기를 향한 선전포고였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하버드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옥스퍼드는 세계의 학문 정신을 이끌어 가는 최고 지성의 명문대학들이다. 그곳에 현대 진화론의 생물학 결정론을 주도하고 있는 두 선두 그룹들이 있다.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윌슨과 옥스퍼드 대학의 리처드 도킨스가 그들이다. 강자의 생존을 위해 약자를 공격하는 것이 자연이 만들어낸 정당한 법칙이라는 그들의 논리가 이 두 기독교(?) 국가에 팽배해 있는 것이다. 마치 서구의 중세 시대가 표면적으로는 로만 카톨릭의 기독교 국가였지만 그들을 지배하던 철학과 과학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헬레니즘 철학과 과학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중세 수도원 운동에서 출발한 옥스퍼드 대학, 청교도 정신으로 세워진 하버드 대학이 전 세계 인본주의의 산실로 탈바꿈한 사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버드 대학의 설립 이념에는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드러나게 하겠다는 선언문이 유리알처럼 빛나며 아직도 남아 있다.

유리알은 또 다시 깨어졌다.
그리고 윌슨과 도킨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충격과 공포와 죽음의 현장...
깨어진 가정과 울부짖는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포화의 연기 속에서 무너지고 스러져 가는 인간성들...배반과 약탈, 방화...
지난 세기 전쟁의 잔혹함을 경험했던 우리 민족에게 이 일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들의 통곡과 눈물의 상처들이 치유되기 위해,
이제 또다시 얼마나 많은 순교자의 십자가가 저 땅 위에 세워져야 할지...
사막의 모래 바람이 메마른 가슴을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