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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 사역/코스탄 현장 이야기

[정진호] 한 영혼, 사랑할 수 있나요?

코스탄 현장 이야기

한 영혼, 사랑할 수 있나요?

내 안에 과연 타인을 사랑할 만한 능력이 있는가? 특별히 고통받고 있는 이웃을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영혼들을 사랑하겠다고 달려온 사역지에서도 종종 회의에 빠져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결론은 "없다"이다. 인류를 사랑하겠다고 박애정신을 외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인류애를 향한 철학 사상을 전개하고 위대한 저술을 남기는 일도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 옆에 있는 힘 없고 고통 받는 소자를 사랑하기 위해 내 자신을 지속적으로 희생하는 일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고아원과 학교를 운영하며 더러는 영적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많은 기독교인조차도 쉽게 빠지는 실패와 오류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1)

1990년 코스타의 부르심을 뒤로하고, 1991년 초 서둘러 포항에 정착한 나는 곧바로 교회 고등부 교사로 자원하여 젊은 영혼들을 향한 복음의 열정(?)을 불태우는 한편, 보스톤의 Gate Bible Study에서 훈련받은 대로 포항공대와 연구소 박사들이 몰려 사는 교수 아파트 단지에서 몇몇 가정들을 규합하여 부부 성경공부 모임을 조직했다. 주로 믿지 않는 가정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에 사역의 초점을 맞추었다. 고등부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그들로 하여금 헌신케 하는 일은 정말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었고, 그 당시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 벌써 사역자로 헌신한 열매들이 있을 정도이니, 무던히도 열심히 가르치고 또 배웠던 것 같다. 그러나 미국서부터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고 가장 뜨겁게 준비하며 기도하였던 프로젝트 팀의 선후배들은 시작 초기부터 거센 반발과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술좌석에서 세상 철학을 논하며 그토록 가깝고 서로 말이 통하던 친구도 예수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색이 변하고 금새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술자리나 일반적인 대화에서조차 예전과는 판이하게 변해버린 나의 태도가 그들을 당황하게 하였고 더러는 불쾌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내가 소속된 팀은 그 당시 포항제철이 일본의 신일본 제철과 회사의 사활을 걸다시피 하며 서로 경쟁하는 차세대 신기술 개발을 위해 구성된 특별 프로젝트 팀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과 함께 일에 대한 많은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MIT에서 특별히 스카웃이 되다시피 한, 두 사람의 대학 선배와 더불어 주로 자존심(?)이 강한 S대 출신의 선후배 박사들로 구성된 이 팀원들은 출발 당시부터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는 일 중독(workaholic) 증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과연 저들이 100여 년 동안이나 불가능하게 여겨지던 꿈의 기술을 그것도 종합 엔지니어링의 경험이 전혀 없는 풍토에서 시험공장(Pilot Plant) 규모의 대형 프로세스 개발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호기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업무지향적(task oriented)이던 팀원들은 심리적인 압박 속에서 더욱 일에 사로잡혀 갔다. 연간 예산이 100억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모든 팀원들은 주말도 없이 매일 밤 자정을 넘어 퇴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각 가정들은 점차로 남편과 아빠를 잃어버린 가족들의 원망과 한숨 속에서 점차 병들어 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내가 그들에게 교회를 나가자든지 성경공부를 같이 하자고 말을 꺼내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이 우상이 되어버린 가운데 한 팀 안에서조차 다른 사람에게 서로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리가 서로를 붙잡고 있었고, 모든 팀원들의 마음이 영적으로 강퍅하게 닫혀있었다. 나는 직장에서 맡겨진 내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일에 중독되지 않기 위해서 내 자신을 지키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 깊이 깨달았던 한 가지는 내가 만일 미국서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면 분명히 그들과 함께 동일한 모습으로 일에 중독되어 경쟁적으로 치달았을 내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든 일을 중단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제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예배라는 안전 장치가 있었던 것이다. 예배는 죄의 욕망에 빠지기 쉬운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영적 보호막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 새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아무튼 그 시절 나는 새벽마다 팀원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매달려 기도를 하면서도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하고 의심이 자꾸만 일어나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것만 같은 답답함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한 군데도 영적인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M이라는 선배가 있었다. S대 금속과에서도 항상 수석을 달리던 사람이었고, MIT에서도 함께 있어 잘 알고 지냈던 선배였다. 박사 학위를 마친 후에, 나보다 1년 먼저 이 팀에 합류했던 그 선배는, 집안 배경이 불교 쪽에 가까웠을 뿐 아니라 일에 대한 남다른 강한 집착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적으로는 기독교에 오히려 반발심리(?)까지 지닌 사람이어서, 기도를 하면서도 마치 이 팀에서 예수를 믿게되는 가장 마지막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QT 노트를 돌이켜 훑어보면 항상 그 선배를 위한 기도가 첫 자리에 올라가 있었던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첫 1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그 같은 인간적인 생각을 산산이 무너뜨리는...,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방법을 통해 마침내 이 팀에 구원의 문을 열고 계셨다. 일이 우상이 되었을 때 가정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에 매달려 춤추듯 희비의 쌍곡선을 오르내리던 우리 팀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 사건이 발생했다. 성악을 좋아하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M선배의 부인이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병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 가정은 갑자기 산산이 깨어져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부인이 병원에 입원하자 두 아이를 각기 본가와 처가로 보내고 홀로 남게된 그 선배는 이 일로 인해 큰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뛰며 치달아오던 그가 강제로 발걸음을 멈추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아내를 낫게 하려고 여기 저기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지쳐서 주위의 권유를 따라 부인을 데리고 기도원을 찾게 되었다. 거기서도 아내의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선배가 예수 십자가 앞에 세워지면서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던 죄악들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마침내 그의 심령이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기도원에서 돌아온 후, 후배인 나에게 찾아와 교회로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던 그 선배의 떨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동안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던 후배를 찾아와 부탁을 했을까? 교회 문을 함께 들어설 때 마침내 그동안 쌓여있던 온갖 죄악이 눈물을 통해 하염없이 흘러나오며 회개에 회개를 거듭하던 그 선배는 결국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면서 통곡을 하였다. 그렇게 견고해 보이던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손길에 힘없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일은 비단 M선배만의 일이 아니었다. 함께 일하던 우리 팀은 전원이 깊은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려가던 발걸음들을 제각기 멈추고 자신들의 인생을 뒤돌아 보게끔 되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부터, 유학을 위해 그리고 또 학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가? 좀 더 나은 위치와 직장을 위해 달려왔던 지난 시간들.... 가정과 주변의 많은 것들이 내 앞에 놓인 앞날의 영광(?)을 위해 유보되었고 희생되어 왔었다. M선배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학 생활 시절 이국 땅에 홀로 데려가 유학생 기숙사에 댕그라니 남겨진 아내를 희생하며, 오직 박사 학위를 위해 밤낮으로 실험실에서 밤을 지새웠고, 그 아내 역시 학위만 끝나면 모든 것이 풀리고 행복한 장밋빛 미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줄로 생각하며 참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은 유학 시절보다도 더 영적으로 힘들고 암담했으며, 남편들은 더 큰 욕망에 휩싸이며 날이 갈수록 가정에서 멀어져만 갔던 것이다. 비록 프로젝트에는 성공하여 우리 팀의 업적은 신문 지상과 TV의 온갖 매스콤을 타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상처투성이의 영광이요 쓰러져 가는 가정들 뿐이었다. 과연 무엇을 위해 우리는 질주했던가? 마치 이상의 시 <오감도>에 나오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질주하던 13인의 아해들처럼(그 때 우리 팀이 어쩌면 바로 그 13인의 아해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뛰는 줄도 모르면서, 남이 뛰니까 무작정 함께 뛰는..., 안 뛰면 불안해서 달려나가는 그런 인생들을 살아가던 우리 팀에게 마침내 빨간 정지(Stop) 사인이 걸리고 만 것이다. 퇴근 시간이 저녁 6시로 정상을 되찾았다. 각 가정이 주말에 남편과 아빠를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2)

고난 가운데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묵상해 본다. 폭풍우가 지나간 것과 같았던 그 시점에, 나는 조심스럽게 몇몇 동료들을 향해 함께 성경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하였다. 마침내 어느 월요일 저녁 일과 후, 4명의 팀원이 처음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펴 들었고, 꿈에도 그리던 직장에서의 첫 <월요 성경공부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 후로 한 명 두 명씩 그 모임이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반 년 후에는 10여명으로 늘어나 그 팀의 연구원 대부분이 창세기 성경공부를 같이 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파일롯 플랜트를 세우는 현장 사무실에서, 그 바쁜 일과 속에서, 월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함께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나누며 또 기도까지 하는 놀라운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이 형성되었다. 팀장이었던 K선배는 M선배의 일로 충격을 받은 후, 비록 자신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 성경공부 모임을 위해 항상 월요일 저녁 시간을 비워주는 배려를 해 주었다. 거의 대다수가 한번도 성경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그들 가운데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면서 창세기에 감추어진 복음 앞에서 점차 드러나는 자신의 실존들을 깨달아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세기가 끝나고 마태복음이 시작되자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모임을 인도하면서 나는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던가?

한편, 나는 이제 막 신앙의 걸음마를 시작한 M선배와 더불어 매일 새벽 QT를 시작했다. 유난히 아내를 사랑했던 그 선배가 병원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며 죄책감으로 더러는 원망으로 힘들어할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홀로 남은 그의 곁에 있어주는 일이었고 함께 그 아픔에 동참하는 일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그 시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다가 오셔서 가르쳐 주신 것은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아픔과 안타까움이었다.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에는 마음이 빨리 움직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에는 무디고 더딘 나에게, 그 선배를 통하여 상처 입은 한 영혼을 어떻게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다.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는 일 조차도 자신의 영적 만족을 채우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가 되기 쉬운..., 그런 위선 속에 쉽게 빠져드는 그런 사람에게, 정말 고통받는 한 영혼을 사랑하며 돕는다는 것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그저 동정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영으로 그의 마음에 들어가 하나됨을 확인하는 순간 그 영혼을 향한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쳐 흐르는 참 아픔의 눈물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자리로 찾아가고 내려가 그의 마음 속까지 들어가기까지..., 나는 쉬지 않고 기도하였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깊이 탄식하시는 그 소리를 들었다. 어두운 새벽, 자명종 소리에 벌떡 일어나 먼저 기도를 드린 후, 그 선배의 집을 찾아갈 때의 심정....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초조히 발걸음을 옮기는 안타까움의 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아파트의 문을 두드려 잠든 선배를 깨우고, 함께 앉아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나눌 때마다 성령의 손길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어루만져 주었으며, 우리는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었고 부르짖어 하나님 앞에 함께 매달렸던 것이다.

그 선배와 더불어 새벽 QT를 시작한지 약 반 년 만에 맞게된 92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 우리 두 사람은 어쩌면 평생 잊지 못할 체험을 각기 하였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일을 마무리 짓고 연휴를 보내야겠다는 심정으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날 퇴근 무렵, 그 선배가 내 옆에 다가와 "정 박사 퇴근 안 해?" 라고 두 번쯤 물었고 나는 일에 빠져 건성으로 "예, 곧 할게요."라고 대답을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어두컴컴한 건물 안에 나 홀로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설레임은, 믿는 자건 믿지 않는 자이건 마찬가지로 다가온 듯, 다른 날은 찾아볼 수 없는 정적이 복도에 흐르고 있었고, M선배의 오피스는 이미 잠겨 있었다. 나는 그제야 M선배가 어디로 갔을까 하는 걱정이 와락 들어 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보다가, 무작정 차를 몰고 나가 그를 찾아 온 시내를 헤매기 시작했다. 아무데도 갈 곳이 없고 반겨줄 가족이 없는 이 거리를 홀로 헤매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혹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유혹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이전에 잘 다니던 술집까지 찾아보았으나 허탕이었다. 주님이 맡기신 한 영혼도 제대로 책임을 못 지고 결정적인 순간에 놓쳐버린 내 자신을 생각하니 너무나 한심하고 속이 상해서 가슴이 저리기 시작했다. 길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그가 혹 나쁜 곳으로 가지 않기를 기도하며 예수님이 친히 그의 곁에서 지켜주시기만을 간절히 구했다.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오니, 크리스마스 식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M선배는 어디다 두고 혼자 들어와요?" 혹시나 연락이 올까 해서 한참을 더 기다리다가 결국 우리끼리 맞이한 쓸쓸한 크리스마스 식탁에서 나는 첫술을 뜨다말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밤 열시가 지났을까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더니, 마치 산타클로스나 된 것처럼 선물 보따리를 한아름 안고 M선배가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 집은 갑자기 축제 분위기로 바뀌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홀로 북적대는 거리에 나서니 처음에는 어디로 가야할지 정말 막막하고 형언키 어려운 외로움이 몰려왔다고 한다. 음식점에서 쓸쓸히 저녁을 먹으며 흩어진 가족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선물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예수 믿은 후 처음으로 맞는 의미 있는 성탄절에 가족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산다고 생각하니 기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백화점을 오르내리며 아내와 두 아들에게 줄 선물,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줄 선물과 카드까지 고르며 사는 동안에 조금 전까지 그를 감싸고 있던 외로움은 사라지고 마치 온 몸이 두둥실 떠가는 듯한 이상한 기쁨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시간, 누군가가 자신 옆에서 바싹 붙어서 뒤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면서, 예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기 위해 바로 옆에서 친밀히 동행하는 듯이 느껴지는 이상한 체험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체험이 있고 난 이후, 나는 새벽 말씀 속에서 형수(선배의 부인)가 나아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때 아침마다 한 단락씩 함께 보고 있던 고린도 전후서가 끝날 때 형수가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93년 새해에 들어서면서 그때까지 전혀 차도가 없던 그녀가 갑자기 기적처럼 낫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 해 봄 부활절 무렵, 그녀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이 퇴원하여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우리는 말로 표현키 힘든 감사와 기쁨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성악가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던 그녀가 마침내 교회에 발걸음을 하면서, <월요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한 형제의 결혼식에서 찬송가 288장 <완전한 사랑>으로 축가를 불렀던 것은 두고 두고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날 성경공부 모임 가족 전원이 함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 계획해 놓셨네...> 하는 찬양을 교회에서 올려 드림으로써, 교회의 믿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결혼식에 참석하였던 믿지 않는 많은 직장 동료들 앞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며 영광을 돌렸던 것이 지금도 생생한 감격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같은 기쁨의 선물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고 완전히 회복된 것처럼 느껴졌던 그 가정은, 몇 년 후 형수가 다시 병이 재발하여 그 선배에게 아픈 상처를 남기고 결국 먼저 하늘 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지금도 나는 그 선배 가정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아리고 안타까움에 휩싸인다 - 이제는 교회에서 칭송받는 집사로 변하여 새신자들을 섬기는데 앞장서는 분이 되었고, 나에게는 둘도 없는 형제요 신앙의 동역자요 후원자가 되었지만.... 우리 가족이 중국으로 떠날 때 그렇게 아쉬워하던 그 선배와 형수의 모습.... "정 박사! 자네가 가고 나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 하며 조용히 눈물을 글썽이던 그 선배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가족이 중국에 와 있는 동안 그 선배는 다시 이전의 모습처럼 일에 빠져 들어갔고, 하나님이 주신 회복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형수의 죽음을 통해 그 선배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대속의 피를 직접 체험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모두가 구원을 얻는 축복도 함께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과 하시는 일을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그 분께서 앞으로 그 선배에게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지......

그러나, 그 무렵 나는 그 선배 사건을 통해 새벽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며 이미 중국을 향해 부르시는 그분의 강한 음성을 듣고 있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내게 맡기실 또 다른 영혼들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후기 : 이 글은 유학 생활 후 곧바로 한국에 돌아와 직장과 가정을 함께 섬겨야할 코스탄 후배들을 위해 기도하며 썼습니다. 그러나 혹시 이 글로 인하여 사랑하는 M선배의 마음에 다시금 옛 상처를 기억나게 하여 아프게 할까봐 무척이나 조심하고 고민하였습니다. 부디 성령의 위로하심이 그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만져주시고, 또 새로운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더 크신 사랑이 선배의 가정과 두 아들에게 나타나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