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과 신앙/이시훈의 살며 생각하며

[이시훈] 백설 공주 이야기 1

이코스타 2001년 12월호

백설 공주의 계모인 왕비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아내를 잃은 왕이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워서 주변의 이목이나 만류를 물리치고 맞아들인 여인이었을 겁니다. 처음 그녀가 왕실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기도 하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전(前) 왕비의 기품 있는 모습과 온화한 인품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공주를 돌보기보다는 자신에게 모든 관심과 시간을 쏟고 있는 왕비에 대해서, 그녀에게 온통 빠져있는 왕의 지나친 사랑에 대해서 사람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떠도는 계모에 대한 온갖 속설과 선입견들, 나쁜 계모들에 대한 무수한 사례들이 다 그녀의 몫이 되어 갔습니다. 왕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이나 인격적인 불찰도 그녀의 탓으로 돌려지기까지 했습니다. 악의적으로 조작된 그녀의 과거에 대한 그럴싸한 증거들과 부도덕한 루머들이 사람들의 호기심과 무료함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문과 위증의 폭력으로 그녀의 행복은 박살 나 버렸습니다. 왕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왕에겐 지켜야할 체면과 자존심이 한 여인의 상처를 위로하는 것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불행을 통해서 은밀한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평범한 신분의 여인이 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건 얼마나 배 아픈 일이었는지,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은 얼마나 큰 질투의 대상이었는지. 타인의 행복은 결코 나의 기쁨의 원천이 아닌 것을 사람들은 깨달았겠지만, 타인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자신의 가엾음을 깨닫지는 못 했나봅니다.

왕비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밝고 쾌활하던 성격은 우울하고 의심 많은 성격으로,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던 성품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조소하는 시각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녀의 가장 큰 절망은 사랑 받지 못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각은 그녀에게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었습니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자신, 누구의 관심과 염려스런 눈빛도 받지 못 하는 자신, 그리고 아무도 믿지 못 하는 자신.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서 달팽이처럼 단단한 껍질 속에서 웅크리고 살아가는 여인의 마음에는 증오와 분노, 슬픔의 깊은 웅덩이가 패였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거울이었습니다. 거울은 또 하나의 자아, 그녀의 내면을 표출해 놓은 장치였을 겁니다. 거울조차도 이제는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에게도 배반 당했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할 능력조차 상실한 거지요.

어느새 아름다운 숙녀로 자란 공주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모든 증오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전에 그토록 혐오하던 인간의 질투심과 사악한 마음이 바로 그녀 자신의 성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질투한 것처럼,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질투한 것처럼, 공주를 지켜야 할 자가 그를 치는 자로 변해 버렸습니다. 질투와 경쟁심에 눈이 멀어 버린 겁니다.

사울이 다윗을 향해 정녕 죽이리라고 다짐했듯이 그녀도 총명하고 아름다운 존재, 모든 존귀와 사랑의 대상인 공주를 향해 광적인 분노를 품었습니다. 질투는 모든 죄악의 씨앗이 됩니다. 질투는 스스로를 찢고 상대를 상처 입히는 커다란 가시와도 같은 것입니다. 왕비는 공주를 질투했습니다. 사랑 받는 존재를 질투했고 아름다움이 인정받는 것을 무엇보다 더 질투했습니다. 카인은 인정받지 못함에 분노했습니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 욕망의 하나일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왕도 시민들도 거울조차도 그녀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질투는 절망의 음습한 그늘에서 자라나는 독버섯과 같은 것입니다. 완전히 깨지고 절망한 그녀가 세상을 질투하고 분노하고 증오하며 결국 흉악한 마녀의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 우리 안의 죄성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치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능력이 그다지 충분해 보이지 않습니다. 거울을 붙잡고 아무리 수 없이 되물어도 거울은 흔한 위로의 말 한 마디도 건네주지 않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정녕 나는 나를 사랑하느냐, 정녕 나는 아름다우냐." 이 물음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일까요? 아무에게도 기댈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외로움과 절망의 부르짖음에 누군가 대답해 준다면 당신의 아픔은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두가 나를 비웃고 멸시해도 누군가 나를 위해 목숨마저 바칠 정도로 사랑한다면 자괴감에 시달리던 자아는 빛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남들에게 인정 받을 만한 것이 많지 않아도, 무한히 쏟아지는 사랑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나 아름답다고 말하십니까 -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아가2:15)라고 고백하며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합한 아름다움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의 육신이 완전하지 못해도 이목구비가 바르지 못해도 그분은 우리의 아름다움에 도취해 눈을 떼지 못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 나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그의 사랑으로 나를 침묵하게 하시며 나로 인해 노래 부르며 즐거워하시는(스바냐3:17) 분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절박한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며 나를 찾겠다고(이사야 42:14) 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움을 느껴 보십시오.

이 세상의 나는 것들과 땅에 기는 것들과 바다의 모든 것들과 산천초목을 다 주시겠다고 누리고 정복하라고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짝사랑을 받아 들인다면, 무엇에 상처받고 무엇을 질투할까요.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 사랑받는 존재라고 깨닫는 순간 부서진 자아는 더 단단한 형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소중한 존재, 유일한 존재이며, 당연히 사랑 받아야 할 대상이며 넘치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든든한 품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시길....

'삶과 신앙 > 이시훈의 살며 생각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시훈] 너 자신을 알라  (1) 2002.11.01
[이시훈] 말씀의 육화(肉化)  (0) 2002.10.01
[이시훈] 편지  (0) 2002.09.01
[이시훈] 열망  (0) 2002.08.01
[이시훈] 백설공주 이야기 2  (0) 2002.06.01
[이시훈] 고백  (0) 2002.05.01
[이시훈] 친구를 위하여  (0) 2002.04.01
[이시훈] 향기  (0) 2002.02.01
[이시훈] 패자(敗者)들의 종교  (0) 2002.01.01
[이시훈]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0) 2001.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