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과 신앙/이시훈의 살며 생각하며

[이시훈] 친구를 위하여

이코스타 2002년 4월호

드라큐라 백작은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좁고 어두운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수 백년 동안의 고독과 처절하게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그리워했습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과 사랑 받고 싶은 갈망에 피가 타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격렬한 갈증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굶주림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의 방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완전한 하나가 되기 위해 서로 같아지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선택한 사람은 피의 공유와 더불어 동류의 흡혈귀로 바뀌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 시켜가며 존재의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이 그의 사랑의 길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나르시스의 기질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솔직한 본능의 하나입니다. 부족하고 거짓되고 스스로 용납하기 어려운 속성을 가진 자신이 못마땅하고 괴로울지라도,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힘이 생을 이끌고 가는 견인차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자신과 비슷한 취향, 환경, 가치관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곤 합니다. 게다가 내적인 기질이나 목표가 비슷한 사람에겐 쉽게 친근감을 느끼고 다가가게 됩니다. 우정이라는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반드시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지요.

처음엔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 대상을 찾고 친밀감을 느끼던 우리는 점차 가까워질수록 상대에게 자신과 같아지기를 요구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스승은 제자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자신의 가치관과 생활관을 그들에게 적용하기를 강요하게도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흔히 믿고 있기에 상대가 상처받고 있는지 점검할 이유를 느끼지 않은 채 맹목의 사랑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비단 개인적인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진 단체들간이나 세대간의 갈등, 인종간, 국가간의 갈등에서도 이러한 가치관의 강요는 나의 것만이 옳고 아름답다는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타인의 개성과 독특성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누고,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즐기고, 생각과 감정을 공감하고 싶은 욕망도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나와는 생각도 다르고 취향이나 표현 방법도 다르며 살아가는 배경도 완전히 다른 사람을 친구로 인정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 인지요. 상반된 가치관과 생활관의 차이로 의견이 대립되고 그것이 확대되어 미움과 분노로 변하기조차 합니다. 사소한 이해관계로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개성은 눈에 거슬리게 보여지기도 하고, 다른 습관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나와 일치하지 못하는 상대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깡은 학생들에게 "그대는 넷을 셀 줄 아는 인간인가?"라는 선문답 같은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여기서 묻는 넷은 정신분석에서 흔히 차용하는 숫자 상징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넷의 범위는 우리가 접하는 세계의 범위, 즉 관계의 범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자아의 삼 요소인 주체(subject), 대상(object), 에고(ego)에다가 타자(other)가 포함된 세계에 살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닌 이웃들이 포함된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매우 커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나보다 지식 수준이 낮거나 지능 수준이 낮다고 무시하거나 사회적 지위나 환경이 나와 걸맞지 않는다고 외면해온 이웃들, 가치관이 너무 다르고 취향이 천박하다고 멀리해온 사람들 마저 나의 울타리 안에 받아들이는 열린 자아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하거나 용납할 수 있단 말이지? 하며 자문할 때, 내 안에 울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너의 그릇됨과 어리석음과 교만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의 부족함이 가득한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나는 언제나 너의 말에 귀 기울이고 같이 아파하고 받아주는 친구이길 원한다." 보기에 그럴듯한 명예를 가진 친구를 갖고싶은 속된 욕망과 비슷한 부류에서 친구를 찾는 폐쇄적인 마음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소외 받는 이웃들, 삶의 다양한 고난에 상처받고 신음하는 이웃들을 셀 줄 아는 사랑은 훈련이나 결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선하신 존재로 인해 변화 받을 때 나의 이기적인 본성도 변하게 됩니다. 드라큐라 백작의 그 어둡고 좁은 관은 그의 자아 세계를 의미합니다. 단절된 관계 속에서 외로움에 지치고 병든 자아, 일직선상의 사랑은 그를 구원할 수 없는 길고 긴 고독의 시간에 가두고 마는 것입니다. 관계의 고리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열린 삶, 누구나 나의 친구가 되어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넷을 셀 줄 아는 성숙함을 갖게 되길 원합니다. 내가 내민 손에 누군가 손을 마주치며 지나가는 일, 혼자서 박수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