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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이시훈의 살며 생각하며

[이시훈] 연극 무대에 서서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연극에서 배우가 자신이 맡은 인물에 대해서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은 대부분 상상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 그가 성장한 배경, 현재의 환경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심지어 그 인물의 외모, 성격, 가족, 친구 관계, 신앙, 특이한 버릇... 모든 것을 세밀하게 생각하고 그 연극에서 요구되는 인물과 가장 적합한 한 인물의 인격을 창조해내는 것이 배우의 몫입니다.


현실에서 연극의 한 부분을 이용하다 보면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연극을 통해서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거나 경미한 정신, 심리 질환에도 치료효과가 상당히 있는 것을 봅니다. 연극 속의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자신과 동일화하려고 노력하듯이, 일상 속에서도 타인에 대해 내가 그의 역할이 되어보는 것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지름길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바로 그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그룹 성경 공부를 할 때 저는 가끔 연극적인 방법을 이용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극화해서 각 사람에게 역을 맡기거나, 대화하는 장면을 대사 읽듯이 감정을 살려 읽어보라고 권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시키는데, 가장 솔직하고 미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설명이나 간증, 지식적인 주석 보다 가끔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고 참 감사를 드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얼마전 청소년들과 이성간의 교제와 결혼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창세기를 읽게 된 경험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18-25절까지를 즉흥적으로 연기해보라고 했을 때 학생들은 아무 어려움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풍족한 자연을 즐기는 아담이 종일 아름다운 벌판을 거닐며 시간을 보낸다. 아담이 지나치는 곳마다 새로운 식물과 동물을 만난다.



아담 : 내가 너를 장미라고 부르겠다. 너는 장미가 되어 향기와 예쁜 꽃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라. 내가 너를 사슴이라 부르겠다. 너를 호랑이라 부르겠다. .....

이것을 말하고 난 학생은 자신감에 넘쳤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말 커다란 권위를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종일 먹고 즐기고 다니던 아담이 어두워지자 주변을 둘러본다)



아담 : 하나님, 다 좋은데요, 무지 심심하거든요. 누가 같이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혼자 많은 일들을 하려니 힘들어요. 생각도 잘 안 떠올라서 누가 도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담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의 그의 갈비뼈를 가지고 이브를 만드시고, 아침에 일어난 아담은 아름다운 이브를 발견한다)

아담 : 앗 ! 당신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요 !

내게 와주어서 너무나 고맙소 (몹시 기쁘고 감격하여 펄쩍 뛰면서 춤을 춘다)



이브 : 나는 당신을 돕고 함께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두 몸이지만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번성하라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아담 :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 없어야하고 서로 부끄러운 일이 없어야 해요.


그 날의 공부는 스스로 깨닫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기쁘고 감사한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과,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를 맺고 서로 존중해야한다는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명, 남녀의 역할에 대해 어렴풋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학습과 토론을 통해 분명한 가치관을 정립하기까지 확실한 기초 작업을 한 셈이지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짧은 삶도 어쩌면 하나님이 기획하신 커다란 연극 무대에서 한 배역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결코 우연함이 없는 완벽한 대본과 연출에 따라 자신이 맡은 인물을 최선을 다해서 표현하는 것 말입니다. 언제 등장해서 무대 어느 쪽에 서야하고 언제 퇴장해야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연출가의 몫일 뿐입니다.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되어 각광을 받거나 조연이나 단역을 맡거나, 영웅이 되거나 악당이 되거나 상관없이 그 연극이 완성되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필요하지 않은 역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인물도 추한 인물도, 완벽한 성품과 지혜를 가진 인물도 어리석은 인물도, 부자도 걸인도 우리의 커다란 드라마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합니다. 훌륭한 배우는 더 근사하고 멋진 역할을 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 이 기피하는 역할을 완벽하게 표현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주셨건 하나님의 무대에 초대받았다는 것이 가장 감사한 일이 아닐까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통해서 연출가의 의도와 목표가 잘 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배우야말로 트로피를 손에 쥐고 웃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겠지요. 연출가의 마음과 배우의 마음이 일치할 때의 기쁨은 서로가 늘 가까이 있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어떤 역을 맡았는가 보다는 얼마나 아름답고 진지하게 나의 역을 감당했는지를 연출가는 눈여겨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