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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이시훈의 살며 생각하며

[이시훈] 고백

이코스타 2002년 5월호

"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넘기는 도끼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 최 문자 "고백"

한 시인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자신을 상처 입히고 괴롭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자신의 향기를 남겨 주고 싶은 소망. 그러나 그렇게까지 아름답지 못한 자신의 한계를 반성하는 일은 원망하고 비난하는 일보다 몇 배나 더 힘든 일 같습니다. 흔히 말하듯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공식이 만연한 시대에 우린 살고 있습니다. 자존심이 긁히는 일은 도저히 참을 수 없고, 손해 보는 일도 절대 용납 할 수 없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자세로까지 비춰지기도 합니다. 친절함, 배려하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이 미덕으로 인정받기보다는 조금 어리숙하거나 힘없는 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까지 전락되어 버리거나, 사회적으로 적응력이 부족한 태도로 보여지는 현실이니까요. 누군가에게 받은 은혜는 받은 만큼 돌려주고, 받은 상처나 모욕은 배로 갚아줄 때 속이 후련한 것이 보편적인 속성이 아닌지요.

우리는 개인적인 관계에서 비난당하거나 손해를 입거나 배신을 당한 크고 작은 경험들을 가지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일들은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신감이나 냉정한 인간관계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받은 아픔만큼 되돌려 주어도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또 다른 종류의 상처를 더할 뿐이지요. 역사를 돌아볼 때 보복으로 인한 결과는 인류에게 재앙과 반복되는 악의 근거를 제공했고, 승자는 없이 패자만을 남게 했습니다. 개인이건 한 사회건 누군가 보복의 고리를 끊음으로써 공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참고 양보해야하지 라는 질문이 내부에서 자신을 흔들겠지요.

향나무를 찍는 도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든든하고 아름다운 한 그루의 나무가 잘리우는 것은 안타까운 일임에 분명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 나무는 훌륭한 가구가 되어 쓰임을 받기도 하고 악기가 되어 영혼을 매혹시키는 소리를 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를 찍어 내리는 고난이 우리의 자아를 더욱 성숙시키고, 이 세상에 더욱 필요하고 유익한 인격의 존재로 단련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고난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준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였고, 잘못도 없는 자신을 죽이려고 달겨드는 사울로부터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도액을 향해 복수의 칼을 휘두르지 않았고, 사울에게는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의 모습을 우리는 다윗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욕 당하셨고 의심 받으셨고 거듭거듭 배신 당하셨지만, 더 큰사랑을 되돌려 주셨고 자신을 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에 그리스도의 향이 흠뻑 묻혀져 있습니까?. 주님의 보혈의 흔적과 향이 우리의 영혼에 스며들어 있음을 믿는 것이 제 사랑의 고백입니다.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마태 복음 6: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