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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차문희의 크리스천 교사 리포트

[차문희] 다양성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of Diversity)

이코스타 2002년 10월호

내가 일을 하고 있는 학교는 공립 학교이기 때문에 참으로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흑인, 백인, 히스패닉, 그리고 동양인 아이들, 가정 형편이 좋은 아이들 또 그렇지 못한 아이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이들 아니면 편부, 편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 장애를 가진 아이들, 종교가 다른 아이들... 이 아이들을 통해 참으로 다양한 환경과 문화를 접하게 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교직원들도 마찬가지인데, 동양인인 나를 비롯해서 다양한 인종의 교사들은, 다양한 교육 방식과 교육 철학을 가지고 이런 다양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 편견이 생기기가 쉬운데, 예를 들어 흑인 아이가 편모와 살고 있다고 하면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는 알아보지 않은 채 "에휴, 가정 환경이 안 좋다 보니 좀 불량한 학생이겠군, 거기에다가 유색 인종이니"라는 선입견을 쉽게 갖고 그 학생을 대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그 학생과 가까워지기 어렵고 학습 능률 또한 오르지 않게 된다.

교직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직장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성격과 환경을 지닌 사람들과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일을 하는데, 그때마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서로 다르다' 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묘한 갈등을 가져온다. 많은 사람들이 "가방 끈이 짧은데 과연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라는 식의 생각으로 사람이 가진 내면의 능력보다 이력서에 적힌 외적인 학벌로 사람을 판단해 버린다. 부유한데다가 학벌이 좋고 외모도 출중하여 부러울 게 없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또한 완벽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문제나 어떤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그들 역시 그들만이 갖고 있는 외적인 좋은 조건으로 인해 다른 이들로부터 소외를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똑같은 사람은 없는가 보다. 만일 모든 이들이 똑같은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재미도 없을 뿐더러,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며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학문적인 관점에서의 "인간의 다양성" 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 사회나 미국 사회를 막론하고 어느 사회이건 그 사회만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standardized norm)이 있는데, 이는 그 사회의 문화와 관습을 통해 만들어지며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다른 가정에서 자라고, 다른 교육을 받아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된 사람들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개개인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그들이 갖고 있는 개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 바로 "다양성"(diversity)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닌가 싶다.

현대 가족요법 치료사(Modern Family therapist)인 Marie Bowen은 '대인 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우리는 깊이 생각하기 전에 감정에 따라 평가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올바른 인간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먼저 내 자신이 확고한 주관을 갖고 생각하고 평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즉 감정에 따라 무심코 내뱉는 말이나 행동으로 편견이 형성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이혼의 상처를 갖고 있는 한 자매가 아픈 마음을 위로 받고자 교회를 찾았다고 하자. 그녀는 예배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 자신의 아픔을 치유 받으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리고 혹 치유가 되어 자신의 삶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했다고 하자. 하지만 교회 안에는 그 자매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참 이혼한 주제에, 자기 사생활이나 똑바로 하지, 뭐 그렇게 교회 나와서 봉사를 한다고...." 라고 하며 따가운 시선을 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분의 형상대로 만들어 졌으며, 우리의 죄로 인해 분리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 다시 회복되었다고 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어느 일부의 사람들만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러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하시고 사랑하신 그분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그럼으로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대하신 것처럼 각자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요한 1서 4장).

야고보서 2장은 우리에게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전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을 외모나 그 배경으로 판단하는 것을 금하신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적인 모습보다는 중심을 보신다는 뜻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4장에서도 성경은 "인간의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시 에베소교회는 헬라파와 유대파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져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배경(background)이 다른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라고, 너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한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눈에 보이는 외적인 모습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조차 쉽게 편견의식을 버리지 못해 갈등과 파벌을 일으킬 때가 있다. 말로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행동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야고보서 2장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결국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외적인 부분으로 사람을 판단하며 이로 인해 공동체에서 누군가를 소외시킨다면 이것은 믿는 자의 삶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개개인의 다양한 모습들, 그 자체를 이해하고 존중해 주며,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다양성(diversity)에 대한 올바른 성경의 이해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될 때, 결국에는 이러한 다양한 모습, 그리고 다양한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