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활

[이시훈] 싸이렌의 노래 이코스타 2003년 9월호 올 여름 많은 시간을 저는 바다에서 보냈습니다. 낚시에 재미를 붙여서 어쩌다 시간이 나면 선택의 망설임도 없이 간단한 도구를 챙겨서 바다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무척 더운 날 대낮에 햇볕을 그대로 받으며 서있기도 했고, 갑작스런 폭우를 만나 물고기처럼 젖은 채 낚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곳을 다니다보니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지식도 얻게 되더군요. 이를테면 가는 장소에 따라 잡히는 물고기의 종류가 다른 것과 물고기가 몰려드는 시간을 맞추는 것, 특정한 종류의 물고기가 좋아하는 미끼, 바다 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시간과 고기떼의 움직임으로 그 깊이를 가늠하는 것까지 익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은 손길이 분주할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기도하고, 어떤 날은 종일 허탕을 치면서 깜찍하게.. 더보기
[이시훈] 천사와 씨름하는 사람 이코스타 2003년 8월호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키 크고 잎새 무성한 나무들이 무척 많아서 여름이 되면 곳곳에 울창한 숲이 생깁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건너편의 집들이 사라진 아침을 맞으며 드디어 초록의 시절이 왔구나하는 감각적인 시간을 느끼게 됩니다. 이른 아침 나무들 속을 산책하는 기분은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는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숲 속엔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어 나름대로의 질서 있는 살림을 사는 존재들이 느껴집니다. 나무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식량을 구하는 작은 동물들,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노루 가족, 나무 밑둥에 기거하는 버섯이나 이끼류와 거기에 서식하는 곤충류등...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생물체들의 공동체를 목격하며 그들이 이루어 놓은 경이로운 세계를 바라보곤 합니다... 더보기
[이시훈] 그의 손길이 닿을 때 이코스타 2003년 6/7월호 대부분의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자신들이 활동하고 살아 있는 동안에 인정 받거나 널리알려지지 못했고 어려운 길을 걸었던 것에 비해, 피카소는 매우 젊은 시절부터 그의 천재성을 인정 받아 명예와 부를 누리며 왕성한 활동을 한 대표적인 작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도 처음 파리에 와서 활동을 하던 이십대 초반에는 경제적으로 무척이나 빈궁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친구 막스 자코브의 좁은 방을 나누어 쓰던 이 년간, 먹는 것도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서 밤새워 그림을 그리며 석유가 없어 한 손에 촛불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파리의 뒷골목에 자리한 허름하고 더러운 건물에서 예술가, 행상인, 시인, 노동자 등의 온갖 직업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과 공동생활을 하던 몇 년 .. 더보기
[이시훈] 감사의 이유 2003년 5월호 가끔 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누는 친구인 한 자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저는 이번엔 어떤 따뜻한 글이 있을까 기대를 하곤 합니다. 그녀의 글 속에는 제가 평소 깨닫지 못하는 감사의 의미가 늘 담겨있어 제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십여 년 전 교통사고로 전신장애를 갖고 살게 된 그녀는 휠체어에 의지한 생활에 어느덧 익숙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음악 듣는 것과 책 읽는 일을 무척 좋아하는 그녀의 감사는 자신이 가장 즐겨 하는 일에 지장이 없는 장애를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그녀의 감사는 어리둥절할 정도로 진실하기에 더욱 귀하게 느껴집니다. 성악가의 꿈을 키우던 젊은 시절 늘 .. 더보기
[이시훈] 봄의 찬가 이코스타 2003년 4월호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지던 겨울도 시간의 흐름처럼 슬며시 사라져갑니다. 이른 아침에도 환하게 창을 밝히는 햇빛과 부드럽게 살에 부딪치는 바람, 먼 풍경 위로 번져 오르는 아지랑이가 봄을 알리고 있습니다. 겨우내 땅 속에서 얼어죽은 줄만 알았던 알뿌리들은 여리고 푸른 잎새들을 힘껏 내밀고, 여윈 나뭇가지들에서는 새 눈 터지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만 같아 슬며시 다가가 귀를 기울여 봅니다. 두터운 눈 더미 아래 어둡고 차가운 땅 속에서 그 작은 뿌리가 어떻게 생명을 지키고 있었던 것인지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얼마 후면 제가 사는 동네에는 화사한 벚꽃으로 온 천지가 물들 것입니다. 벚꽃이 가득한 마당이나 거리에 서 있으면 내가 꽃나무의 한 부분이 되어 가는 것 같이 느껴.. 더보기
[이시훈] 오아시스 이코스타 2003년 3월호 발렌타인 데이를 겨냥해 상점마다 예쁘게 포장한 여러 종류의 초코렛과 사탕들이 눈길을 끕니다. 그 예쁜 상품들에 현혹되어 나도 누구에겐가 선물을 하고 싶어져서 여러 이름과 얼굴들을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 상업적으로 변모한 의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많지만, 평소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사람들이나 사랑을 주고받은 대상들에게 달콤한 언어를 보내는 날로 생각한다면 소박하게 사탕 하나, 초코렛 하나쯤 건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일지 너무나 많은 상상과 고찰, 경험담과 나름대로의 설명들이 있지만 쉽게 알 수도 없고 잡히지 않는 것이 사랑에 대한 해석인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얼마 전 본 영화 한편이 떠오릅니다. 바로 이창동감독의 ‘오아시.. 더보기
[이시훈]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 사람 이코스타 2003년 2월호 크리스마스를 앞둔 며칠 전부터 일기 예보에서 비가 내릴 거라고 보도했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에게 하늘에서 아름답고 탐스런 눈꽃송이를 뜻밖의 선물처럼 듬뿍 내려주어, 마음을 무척 들뜨게 만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감마저 갖게 하는 오후에 손님이 한 분 찾아 오셨습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P부인이었는데 기쁨이 가득 찬 밝은 얼굴로 들어오자마자 저를 다정히 안아 주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다가 지난 저녁 그녀와 그 가족들이 경험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좀더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그녀가 제게 해준 이야기를.. 더보기
[이시훈]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이코스타 2003년 1월호 2002년 한 해 동안 매달 집계되는 도서 베스트 셀러 목록에 지속적으로 높은 순위에 오르는 책 중에 탁닛한 스님의 '화( anger )'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해 동안 그렇게 많이 읽히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갖고 보니,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라는 부제가 눈을 끕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내적 감정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인생에 아주 커다란 장애로 삼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첫 장의 소제목 " 눈을 돌리면 화나는 것 투성이다."라는 문장은 매일 매일 일상 속에서 퍽이나 공감이 가는 말인 것도 같습니다. 작고 사소한 일들의 어긋남에서 오는 짜증에서부터 삶 자체를 흔들 정도의 분노를 느끼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과 사람들에 대해서 화나는 마음을 품고 사는지 모르겠.. 더보기
[이시훈] 기도 이코스타 2002년 12월호 당신께 가기 위해 나의 두 손을 버립니다. 세상을 향해 활짝 벌려 있던 두 손을 거침없이 던져 버립니다. 때론 두 세상을 가늠하기 위해 한 쪽씩 나누어 디디고 있던 나의 두 발도 버렸습니다.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눈과 귀 마저 불 속에 던져 버리고 갑니다. 아직도 나를 아프게 하는 가시가 내 안에 있기에 헛되고 헛된 지식과 의문의 짐들을 내게서 떠나 보내기 위해 머리를 지우고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께로 가는 나는 온몸 지워지고 남은 불붙는 심장 하나, 당신의 커다란 마음에 합하여질 작은 조각입니다. 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 몸은 불살라 던지었고 내 마음은 당신께 사로잡혀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느끼게 하소서. 듣게 하지 마시고 헤아리게 하지 마시고 다만 느끼게 하소서.. 더보기
[이시훈] 너 자신을 알라 이코스타 2002년 11월호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일컬어 '산파술' 또는 '상기술'이라고 합니다. 제자들과 주고받는 문답식의 대화를 계속하다 보면 대부분의 제자들은 어떤 설명 없이도 스스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게 됩니다. 자신 안에 이미 있는 기억이나 지식, 지혜를 이끌어 내주는 것이 스승의 역할이며 교육인 것이지요. 즉 그 안에 있는 인식과 지적 능력을 스스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독특한 교육 방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이지요. 이미 모든 답은 네 안에 있다. 우리 안에 이미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인식 능력이 있음을 확인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외침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무지함과 그릇됨에 대해 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