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공동체/장이규의 소그룹 코칭

[장이규] 8월의 윌로우 크릭 스몰 그룹 코우치 이야기

이코스타 2003년 8월호

Q: 나는 순수히 섬기는데 이웃이 날 이용해요! 그 사람이 싫어졌어요!
    어떡하지요?
A: 창조의 3가지 차원 Balance 저울을 Check up 하세요.

한 싱글 자매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그 사람이 정말 싫어 졌어요.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싶어 순수하게 이제까지 끊임없이 도와주고, 나누어 주었는데, 그 사람은 끊임없이 저를 이용만 해요. 이제는 그 사람이 부담스러워 자꾸 피하게 되요. 이렇게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벌써 그렇게 되었는데 어떡하죠?"

전화에 실린 그녀의 목소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섬기다가 지친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철면피같이 양심 없는 사람들에 질린 듯 했다. 하지만 그래도 착해야 하고 복음은 전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의무감 때문에 답답하고 억눌린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어려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이후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늘 가득 차 있었던 한 자매가 유학을 오게 되었다. 그 자매에게 있어서 이 유학은 공부를 위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선교사로의 파송 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유학을 와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 어떤 이웃을 만나게 되면서 이 자매는 전도의 목적을 가지고 지속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에 함께 나갈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2년이 지나도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 자매에게서 미안해 하지도 않고 도움을 부탁하였고, 당연하다는 듯이 필요한 정보를 뺏어 갔다. 그러면서 항상 이 자매에게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간주했다. 반면에 그 자신의 것은 전혀 나누지도, 아니 나눌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시간이 점점 많이 흘러가면서 이 자매에게 결국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피하고 싶은 관계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경우는 전화 통화를 한 그 자매의 경우만은 아니다. 오히려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는 그리스도인 들이 삶의 현장에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복음 선포의 열정을 잃고 오히려 상처 받아 무능력하게 그 자리에 주저 않게 된다. 이 자매의 경험과 비슷하게 심지어는 이러한 경우도 있었다.

결혼 한 한인 유학생 가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기숙사에 살고있는 한 유학생 자매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음식을 만들면 같은 층에 사는 한인 이웃과 나누고 이웃의 아이들이 자신의 집에서 놀 수 있도록 자신의 집을 개방했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 날부터는 늘 당연히 여기고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을 보내는 이웃들이 이 자매에게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공부에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제출해야 할 페이퍼도 정상적으로 끝내는데 어려움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나도 공부하는 유학생인데 자기들은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 아이들을 보내고, 나는 공부도 못하고…"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이웃이 더욱 불편한 존재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 불고기' 먹는 것도 부담되었다. 무엇을 하면 늘 나누었는데 오늘은 특별히 불고기해서 냄새가 나는데 안 나눌 수도 없고, 나누자니 마음이 무겁고...

성격적으로 내성적인 그녀는 결국 말 못하고 답답한 상황가운데 스스로 억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이웃이 싫어지고, 이웃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싶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려 해도 기도가 안되고, 이웃을 만나도 반갑지 않게 되고… 결국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와 같이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섬기다가 사람에 실망하고 상처 입어 주저 앉게 되는 경우를 경험하거나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혹은 우리 주변에 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 착하고 순진하게 섬기는 좋은 그리스도인을 많이 보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할렐루야! 너무 좋다. 참 잘한다.' 하는 칭찬인가? 아니면 '좋은 사람 만나야 하는데', '이용당하지 않아야 할 텐데' 혹은 '지혜롭게 해야 할 텐데', '너무 착해만 가지고도 안 돼' 하는 염려인가? 아니면 칭찬 반 염려 반인가?

그리스도인 이라 하면 모두가 이 두 자매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순진하게 사랑하고 섬기면서 복음을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했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이 자매들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한편으론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칭찬과 염려가 교차해 가는가?

그것은 순진한 그리스도인이 접하게 되는 현실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은 비단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00여년 전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도 그러했음이 분명하다. 그러했기에 예수님도 12 제자들을 양육하여 세우시고 그들을 삶의 현장으로 파송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마10:16a) 예수님은 세상을 '이리'로 표현하신 반면에 상대적으로 제자들을 양으로 표현 하셨다. 물론 '이리'의 이미지는 여러 방면으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바로 그러한 곳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아마 제자들이 접하게 되는 세상이 어떠한 지를 단 적으로 알려주신 말씀일 것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그 이리와 같은 세상을 접할 제자들은 양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음을 지적하여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이리'와 같은 모습을 만났을 때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전쟁에 있어서 적을 알면 그 싸움은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이 '이리'와 같다는 것을 알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2000년 전의 세상이나 오늘의 세상이나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현실은 다를 바 없기에 아마도 그러한 양처럼 순진한 그리스도인 들이 접하는 세상의 쉽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해 2003년 USA 코스타 (KOSTA) 주제도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 인'으로 선정되었으리라!

그러한 세상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세상 한가운데로 보내어지는 제자들에게 2000여년 전에 이렇게 당부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b).

바로 예수님은 '이리'와 같은 세상 속에서 '양' 같은 제자들이 승리하는 전략 2가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 것이다. 첫째는 뱀같이 '지혜'로워야 하는 것이요. 둘째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앞에 '지혜'가 먼저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지혜를 먼저 가지고 난 다음에 순결한 모습으로 살아라 하는 뜻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식당에서 음식이 손님에게 나올 때 음식과 그 음식을 담은 그릇이 하나가 되어 나온 것과 같다. 음식과 그릇을 떼어서 놓지 못하듯이 말이다. 음식을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비유한다면 그 음식을 담은 그릇은 '뱀처럼 지혜로움' 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뱀과 같은 지혜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는 균형 잡힌 모습으로 세상에 내어 놓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이리'와 같은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전략 2가지는 오히려 동전의 앞과 뒤와 같이 하나로 붙어있는 셈이다. '순결'이 그 승리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지혜'는 승리로 이끄는 방법론인 것이다. 결국 이기는 전략은 하나! 야구공 던지듯이 지혜로 감싼 순결의 볼을 던지는 것. 이것이 양 같은 제자들이 바로 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인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뱀과 같은 지혜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는 균형 잡힌 모습으로 세상에 내어 놓여질 수 있는가?

그것은 영적인 차원 (Spiritual Dimension), 육체적 차원 (Physical Dimension), 그리고 감정적 차원 (Emotional dimension)의 균형(Balance)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셨을 때 우리에게 영(Spirit)만 주시지 않았다. 영과 더불어 우리의 육체(Body)와 우리의 마음(Heart)도 만들어 주셨다. 영(Spirit)과 관계된 부분을 영적인 차원(Spiritual dimension)으로 본다면 육체(Body)는 육체적 차원(Physical dimension)이요,마음/감정(Heart)과 관계된 부분을 감정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으로 볼 수 있다. 이것들 각자 각자가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 다른 역할을 하지만 이들은 또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도록 만드셨다. 그래서 서로에게 긴밀하게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먼저 영성 차원(Spiritual dimension) 을 보자 .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날아갈 것(up) 같은 아니 할렐루야가 터져 나오는 감정적 차원의 감격과 사랑, 용서와 같은 내적 변화가 일어나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주님과 동행의 확신으로 인해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지는 육체적 차원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육체적 차원(Physical dimension)을 보자. 육체가 힘이 들어졌거나, 약해지거나, 혹은 병이 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감정적 차원이 처지게 된다(down). 교회에 가는 것도 그리스도인 들의 섬김의 자리에의 참여도 나중으로 미루고 싶어진다. 무엇이든지 귀찮고 일단 쉬고 싶어진다.

감정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을 보자. 누군가와의 관계가 감정적으로 상하거나 불편한 관계가 되면 어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부담이 된다. 가는 길목에 그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돌아서 가고 만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사람과 관계된 것은 무엇이든지 싫어진다. 더욱이 그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일 경우는 찬양과 기도가 막히게 됨을 경험한다. 부부가 싸워도 기도가 막힘을 경험한다. 애인과 싸워도 찬양이 막힘을 경험한다.

이처럼 우리는 영적 차원과 육체적 차원, 그리고 감정적 차원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중 어느 하나를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 세 차원의 밸런스(balaence)가 잘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한 쪽으로 인해 다른 기능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웍샾(Workshop):

이 그림들에 자신의 현재 영적, 육체적, 감정적 저울을 확인해 보라.
셋 다 정상적 인가?어느 저울이 가장 떨어져 있는가?
왜 떨어졌는가?어떻게 그 떨어진 저울을 정상적으로 올릴 것인가?

자!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세 가지 차원 (Three Dimension) 창조의 원리와 그 균형의 지혜를 가지고 이 글을 시작할 때 제기된 자매들의 경우들을 다시 한번 첵업(Check up)하면서 문제와 그 해결 방법을 찾아 보자.

첫 번째 싱글 자매의 경우를 첵업(check-up) 해 보자.

이 자매의 경우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나눔을 통해 전도의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섬겨 왔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 그리스도인 들은 누구나 되어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이다. 이 자매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자매의 마음을 훨씬 전부터 읽어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그 자매의 생각은 모른척하고 그 자매 이용하기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이를 위해 섬기고 나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바울도 권면하기를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갈 6:9a)했던 것 아닌가!.

결국 이 자매의 상태는 상대방의 인격적 관계 (I-Thou)가 아닌 이용의 관계(I-It) 에서 개인적으로 낙심하게 된 상태이다. 그 동안 쌓아 놓은 관계도 무너지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미움까지 생긴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이 자매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이전에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하는 과거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가 더 중요한 문제다.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까?

창조의 3가지 차원과 균형의 저울로 돌아가자. 이런 상태에서 이 자매는 무엇보다도 감정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에서 많이 다운(down)이 된 상태이다. 이 감정이 더 이상의 상대방에 대해서 물질적 나눔과 도움을 피곤하고 지치도록(육체적 차원) 그리고 무의미(meaningless)하도록 만들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선한 의도를 악용하는 것에 미움으로 반응(영적인 측면)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이 자매는 현재 관계가 어그러졌다 할 지라도 관계회복을 위해 의무적으로 노력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감정적 쉼이 필요하다. 관계의 회복은 내가 회복이 되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양적으로 다시 관계가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할 지라도 사람은 지극히 영적인 감각을 가지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내가 회복되지 않은 외양적 관계의 회복은 더 깊은 상처를 두 사람 관계에 가져오게 만든다. 이것이 사탄의 계략이다. 성령의 거룩한 부담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착해야 하고 관계가 좋아야 하고 용서해야 하는 의무감을 자꾸 주어서 부담을 가지게 만들어 결국 깨지고 무너뜨리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이 주시는 것은 내적부터 우러나오는 근본적 자유 함과 억눌림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이지 외양적 겉치레의 관계회복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상대방이 바로 느끼게 된다. 사람이 속으로는 "너 이놈 두고 보자, 잡아 먹을 꺼야" 하면서 겉으로는 웃으며 개에게 "누렁아 이리와" 해 봐라. 꼬리를 살랑거리며 오나. 으르렁 거릴 뿐이다. 하물며 사람이 그것을 모르겠는가?

내 마음이 먼저 회복될 때까지 어그러진 관계 그대로 놓고 쉬어라. 그러면 성령께서 내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기 시작할 것이다. 그 자매의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 주님이 이미 알고 계신다. 주님이 얼마나 자매를 사랑하시겠는가! 만일 어느 제자가 스승의 영광과 그 영광의 나눔을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을 때 어느 스승이 그 제자를 미워하겠는가?

똑같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며 하는 모든 일들을 다 보시고 기뻐하고 계신다. 주님이 우리의 중심까지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기에 우리의 지침과 상함을 만지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쫀쫀하신 분이 아니다. 걱정 마라. 푹 쉬라. 그리고 아픈 가슴 상한 감정 그대로 가지고 주님 앞에 울고 또 울라. 내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이때 성령님이 이 자매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실 뿐 아니라 한층 더 그리스도안에 성숙하도록 이끄신다. 이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성령님은 이 기회를 더 귀하게도 사용하신다. 이제껏 이 자매의 사랑과 섬김을 이용했던 상대방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돌이킬 수도 있게 만드신다. 혹은 이러한 불편한 관계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이 자매에 대해서 조심하게도 만드신다. 이 자매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만드신다.

그런데 만약 그 불편한 사람과 피할 수 없는 자리에 할 수 없이 함께 있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친절한 관계만 유지를 하고, 말조심을 하라. 감정 표현에 있어서 조심을 하라. 그리고 내가 회복될 때 까지 가능하면 잠시 바쁜 것처럼 지혜롭게 일대일 자리를 피하라. 성경의 말씀대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않은 지혜로운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두 번째 결혼한 자매의 경우도 창조의 세 가지 차원에서 그 균형을 첵업(Check up) 해 보자.

이 자매 역시 첫 번째 싱글 자매와 비슷한 경우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본이 된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를 원해 음식을 나누고 아이들을 위해 집을 개방하였다. 기숙사의 누구에게도 좋은 이웃이 되었다. 영적 측면(spiritual dimension) 에서 잘 자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 자매 역시 이웃들의 이기적인 모습들에 상처를 받기 시작했다(감정적 차원: emotional dimension). 그런데 이 자매의 경우 잘 생각해 보면 감정적 차원의 상처를 받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원인이 되었던 것은 자신의 학업의 관리 (management) 문제에서 비롯되었음을 보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놀러 오는 이웃집 아이들에 대해서 내성적인 그녀의 성격이 오지 말라고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 차마 이웃집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덕스러움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이야기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시간을 조절(time manage)하는데 실패하게 되었고 이것은 자신의 학업의 불성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육체적 측면: physical dimension). 이러한 스트레스는 결국 영적인 차원(spiritual dimension)과 감정적인 차원(emotional dimension)을 상처 입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웃이 보내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이웃들의 행위를 이기주의로 보도록 만들었고, 그들과의 관계가 불편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사랑의 음식을 나누었던 것들이 이제는 의무감이 되어서 부담이 되었다. 더욱이 그녀의 내성적 성격은 더욱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표현하는 것을 억눌렀다. 이러한 억눌림은 영적 차원에까지 미쳐 기도가 막히고 결국 이웃이 싫어지게까지 되었다. 급기야는 이사까지 생각하는 가운데 자신의 피해 속에 갇히게 되어 우울증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 자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 차원의 관리가 잘 되지 않은 것이다. 육체적 차원에서의 무너짐이 결국 감정적 차원과 영적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인간 관계와 주변의 일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자신을 피해자의 인생으로 몰아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자매는 육체적 차원의 밸런스(Physical dimensional balance)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 시간 관리를 되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녀들과 놀 시간, 공부 할 시간, 밥 먹을 시간, 등등 의 시간표를 짜라. 그리고는 이 스케줄에 맞추어서 이웃집 아이들이 놀러 올 경우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놀 수 있으니까 그때 오라고 이야기를 해서 자신의 시간을 관리해야 한다. 학업이라고 하는 것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라면 그녀에게 별로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어진 시간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니 만큼 그에게 큰 스트레스의 원인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이것을 보완하려고 밤에 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려 한다. 하지만 육신은 육신인지라 쉼이 필요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또 졸기까지 하게 만들어 보완이 안 되는 적도 많다. 입술을 악 물고 밤에 잠을 줄이고 공부를 한다 할 지라도 역시 낮에 피곤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육신이다. 몸이 피곤하게 되면 만사가 귀찮게 된다. 이웃집 아이들 때문에 쉬지 못해 화가 나고, 누군가를 만나야 하면 피곤한데 이야기해야 하니 피하고 싶고, 심지어는 교회 가는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하는 강한 부담감 때문에 교회에도 가기 싫어지거나 가더라도 한 두 시간 섬기는 것을 굉장히 부담을 가지게 된다. 결국 육체적 차원의 균형을 잃어 버리면 영적, 감정적 차원의 균형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지게 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네 마음(감정적 차원: heart)을 다하고 정성(영적인 측면: soul) 을 다하고 뜻(육체적 차원: mind)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말씀을 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세 가지 측면 모두가 중요함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던 우리의 열정에 혹은 주님을 위한 우리의 섬김에 이상이 생겼는가?

첫째는 창조의 세 가지 차원, 즉 영적인 차원, 감정적 차원, 육체적 차원의 균형을 첵크 해 보라.

둘째는 어느 차원의 어떠한 원인 때문에 그 이상이 왔는지 그 근본적 원인을 진단하라.

셋째는 이상이 생긴 차원의 균형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라.

넷째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이 다 아심을 기억하고 문제를 놓고 기도하라. 그리고 담대 하라.

다섯째는 하나님은 그렇게 째째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한없이 넓고 사랑이 풍성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열정과 섬김에 문제가 생겼나요?

3 가지 창조 원칙 저울의 균형을 첵크 업 하세요.

p.s. 개인적 신앙의 문제가 있거나 소그룹을 인도할 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메일 주세요. 이 지면을 통해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름의 비밀은 보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