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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공동체/성경강해

[김철수] 히브리서 9, 10장 강해

히브리서 9장 강의
율법의 완성/성취: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며
영단번(once for all)의 완벽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첫 언약인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것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의에 상대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의 성질 때문에 율법은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인간을 구원해보려다가 안되니까 새언약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처음부터 특별한 목적을 갖고 주어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좀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제사장의 직분은 백성들의 죄사함을 중재해주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이스라엘의 종교의식의 중심인 성소/성전에 상징적으로, 가시적인 방식으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있는 지성소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대표하여 죄사함을 받고 나오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하나님의 백성으로 죄사함을 받으면서 관계를 (혹은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러한 종교적 삶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예표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인 제도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제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의 의미를 전달해주는 “문화적 형식 (cultural forms)”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담은 특별한 종교 형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것은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종교제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배려해 주신 사랑과 은혜를 경험함으로써 오직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신약시대와도 같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였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여 아무리 완벽한 종교제도가 주어졌다고 해도 그 종교제도 자체가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인간의 죄성을 다룸에 있기 때문입니다.

(2) 이제 예수님은 율법의 제사제도를 좇아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인류)을 대표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12절; 24절). 상징적이며 오직 그림자일 뿐인 지상의 성소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대표하여 하늘에 있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 선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셨다함은 인류를 대표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두번째 아담으로 오셨다는 내용과 상통합니다 (롬 5:12-19; 고전 15:22). 첫번째 아담이 불순종으로써 하나님과의 가장 첫번째 언약을 파기함으로 죄가 들어오고 그 결과 인류에게 죽음이 들어온 것에 반하여,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첫번째 아담과는 달리 완벽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구원받은 새인류의 머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즉, 그분이 그렇게 해주신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신뢰하기만 하면) 그분이 이루신 의가 “전가(transference)”되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토큰인 “하나님 수준의 의”를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서신에서 “의인”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자”라는 뜻입니다 (롬 1:17). 오직 은혜로만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러한 두 번째 아담은 동시에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인하여 구약의 율법의 규례대로 우리의 죄를 우리가 아닌 다른 속죄제물에 전가(transference)시킴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해줄 사명으로 우리에게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인간 (레위) 제사장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그의 족보나 계열의 다름이라기보다는, 속죄제물이 바로 죄와 흠이 없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 간의 죄성은 그 어떤 선한 율법도 결코 다 지키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는 영적 무능력 상태에서 자기의 의에만 만족하여 불행하게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기 위해서는 누군가 완벽한 의인이 대신해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주어야만 합니다. 그 길은 율법에 이미 예표로 나와 있었습니다. 율법의 제사 제도에 의하면 완벽하고 흠없는 그 누군가가 죄인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서 피를 뿌리고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만 합니다. 즉, 대속의 희생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흠없는 의인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인간 세계에 오셨고, 대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바 로 하나님 자신이(성자께서) 두번째 아담(인간)이 친히 되셔서 의로운 희생을 치루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제사제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0:18에서처럼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가 바로 예수님의 대제사장 및 속죄제물되심의 결론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제사는 “영원 가운데 오직 한번으로” (영단번, once for all) 완벽한 제사입니다. 율법의 모든 그림자/모형은 이제 예수님에 이르러서 다 성취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 (요 19:30)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3) 그러므로 이제 죄사함을 얻기 위한 땅에서의 모든 종교적인 의식들은 불필요해졌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의 가책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가 약해짐으로써 죄책감에 끌려 죄사함을 위한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려 한다면, 바울에 엄중한 경책과 경고를 듣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1-4)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 .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14)”

(4)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의 공로에 힘입어 여호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내용이며, 우리에게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9의 내용은 우리에게는 적용적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담력”이라는 말은 “자신감”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parresia인데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편안한 관계나 상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confidence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엡 3:12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하나님께 나간다고 풀어 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 위치입니다. 예수의 피의 희생제사가 가져다 준 결과는 바로 이렇게 완벽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회복인 것입니다.

(5)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약입니다. 그분의 깨끗하신 성결의 피 때문에 우리가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지, 우리의 그 어떤 종교적인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로 인하여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담력, 혹은 자신감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구원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는 약하지만 영원토록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때문에,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우리가 다시 넘어지는 순간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토록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분의 피로 우리의 본질이 바뀌어진 연고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코 다시 끊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cf. 롬 8:31-39).

(6) 그리고 바로 이 은혜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히브리서 10:23-25는 이러한 구원의 결과가 자연스럽게 신앙의 공동체로 나타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값으로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의 가치는 예수의 피값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롬 3:22). 바로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는 동등하며 그 값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이러한 인식에 의하여 우리의 세계관은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10:24-25의 말씀은 진정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강의
완벽한 구원
그리고 새언약의 삶의 원리 (확신!)

이 미 앞 강의에서 히브리서 10장에서 하여야 할 메시지는 이미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시 재반복하면서 옛언약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리스도의 영단번 제사의 효능을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인하여 우리에게 확실하게 일어난 일들을 다시 정리하여 우리의 확신을 더 다져보고자 합니다. 따라서 본 강의에서는 지금까지 강의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우리의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더욱 분명하게 해보고자 합니다. 이 확신이 우리를 지배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나갈 수 있고, 그 어떤 도전에도 흔들림 없이 우리의 신분을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 10:1-9에 의하면 예수님은 옛언약을 폐하러 오셨다기보다는 새언약의 모형/예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옛언약/율법의 원형으로 오셔서 (당신이 친히 대제사장과 제물이 되셔서) 옛언약을 성취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 더욱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혜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성취하기] 하려 함이로다” (마 5:17).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매우 놀라운 결과가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2) 먼저 10:10에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그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거룩함”이라고 하는 말은 역시 구약의 레위기의 주제로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하여야만 한다는 율법의 요구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레 11:44-45; cf. 레 18:5).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해질 수가 없음을 우리는 이미 공부하였습니다. 이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져야만 되는 것으로서, 여기서 “거룩함”이란 말은 바울이 말하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 (칭의, justification)”과 같은 맥락의 개념입니다 (롬 3-4장). 신적 의를 우리의 죄와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고후 5:21)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불공평한 거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감격스럽게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3) 히브리서 10:14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영단번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온전케”라는 단어는 “완벽하게 하다”(teleioo)라는 동사의 현재완료형입니다. 즉, 예수님이 당신의 피로써, (믿는)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용어대로 하면, 의롭다고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또한 하나님이 보실 때에 “완벽하게” 하셨으며 그 효능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영원한 직분입니다 (히 7:24; 히 8:1). 다시 말해서,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제는 의로운 자로서 완벽하게 영원토록 세우신 것입니다.

(4) 이것을 바울의 용어로 바꾼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롬 8:1-2; 갈 3:10-13; 갈 4:5; cf. 습 3:14-17). 예수님의 십자가는 또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갈 3:10-13). 그 결과 믿는 우리들은 결코 죄의 권세에 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몸이 연약하고 아직 우리의 몸이 구원받지 못하여서 시험에 들 때가 많지만, 우리의 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 아래로 더이상 끌고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넘어져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넘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롬 6:14).

(5)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자유는 방종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슴을 주님의 가슴에 맞추어 책임있게 살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전에는 죄의 힘이 너무 강하여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도 죄책감과 육신의 정욕때문에 그러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가슴에 변화가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주님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함, 곧 영적 능력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지키는 투쟁은 끊임없이 우리 삶 속에서 경험되는 영적전쟁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자유는 결과적으로 사탄의 권세와 자신 안에 있는 육신의 힘으로부터도 자유하는 능력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6) 우리가 영적인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영역들은 바로 우리를 안팎으로 도전하는 세상 안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0:32-39에서 성도들을 격려하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핍박도 하고 유혹도 합니다. 사탄은 세상 뒤에 숨어서 세상 문화와 철학과 종교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끊임없이 기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문화관과 전통적인 가치관에 안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알려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탄과의 전쟁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전쟁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을 받은 것이 어떠한 특권이며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테스트할 수 있는 필연적인 영역이기도 합니다.

(7)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하여야만 영적전쟁터인 우리의 현실/삶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담대함(parresia)과 인내와 믿음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32-39절). 이 세가지 덕목은 모두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감격의 결과요 열매들입니다. 나는 그동안 이슬람의 확신과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여 왔습니다. 영적인 전쟁이라고 해서 과격분자들처럼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영적전쟁은 내면의 전쟁이며 확신의 대결이요, 결국 사랑의 대결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나의 가치를 가장 경멸하는 사람들, 그래서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의 믿음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들을 찾아가며 심지어 저들이 원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찾아가서 그들과 대화하고, 그 대화와 만남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이 선교입니다. 이러한 선교적 삶은, 히브리서를 통하여 확인했듯이, 진리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의 삶이 현존할 때에 비로소 세상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